“전 남편(피해자)이 설거지하는 고유정의 뒷모습을 보고 옛 추억을 떠올렸고, 무리한 성적 요구를 거부하지 않았던 과거를 기대한 것이 비극을 낳게 된 단초다.”(고유정 측 변호사의 변론)
12일 오전 제주지법 201호 법정. 전 남편을 죽이고 그 시신을 훼손 후 내다버린 혐의로 기소된 고유정(36) 측 변호인의 변론이 시작되자 방청석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피해자 부모님과 동생에게도 싶은 사죄를 드린다”, “아이가 아버지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말할 수 없이 미안하고 슬프다”는 말이 이어지자 유족과 일부 방청객의 분노가 폭발했다.
급기야 일부 방청객들이 “사죄는 무슨 사죄”, “살인마”라며 고함을 치다 재판부의 제지를 받았다. 이 아수라장 속에서도, 고씨는 어깨까지 오는 단발머리를 길게 늘어뜨려 얼굴을 전부 가린 채 1시간 넘게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방청석 쪽으로 고개를 조금도 돌리지 않았다. 변론이 시작되자 수의 주머니에 넣어온 화장지를 꺼내 눈물을 훔친 것이 그가 보인 반응의 전부다.
지난 달 구속 기소된 이후 고씨가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날이 처음이다. 오전 10시 시작되는 재판을 방청하기 위해 오전 5시30분부터 줄을 서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제주 지역 주민들의 관심은 뜨거웠다. 고3 수험생으로 법정을 찾은 변모(18)양은 “제주에서 흔히 일어나지 않는 일이라 직접 재판 과정을 보러 왔다”고 말했고, 고씨를 강력 처벌해 달라는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는 인터넷 카페 ‘제주어멍’ 회원들도 일찌감치 고씨의 얼굴을 보기 위해 법원으로 달려왔다. 일반인 방청석이 34석으로 제한된 탓에 발걸음을 돌려야 하는 시민들도 수십 명에 달했다.
그러나 이렇게 뜨거운 관심 속에 열린 첫 공판에서 고씨 측은 “의도적으로 죽이지 않았다”는 기존의 항변을 이어 나갔다. 나아가 피해자인 전 남편이 살해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주장하며, 전 남편의 과도한 성욕과 비정상적 관계 요구 때문에 두 사람이 이혼에 이르렀다고 강조했다. 대학 때 연애 시절부터 결혼 후 첫 관계를 갖게 된 과정까지 법정에서 상세히 공개해 빈축을 샀다.
고씨 측은 전 남편이 아들을 만나는 면접교섭일(5월 25일 범행 당일)에도 이런 요구가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전 남편이 고씨에게 수 차례 신체적 접촉을 해왔고, 범행이 발생한 제주 조천읍의 펜션에서도 성관계를 시도했다고 밝혔다. 고씨 측 변호사는 “아들이 수박을 먹고 싶다고 해서 싱크대에서 수박을 씻고 있을 때 피해자가 다가와 고씨의 몸을 만졌다”면서 “고씨는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됐고 현남편의 아이를 임신했을 가능성이 있어 피해자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또한 고씨 측은 사체를 훼손하고 숨긴 혐의는 인정하면서도, 살인이 계획적ㆍ고의적으로 이뤄졌다는 수사 결과에 대해 강하게 반박했다. 범행 발생 전 ‘졸피뎀’, ‘혈흔’, ‘뼈 버리는 법’ 등 살해 방법과 사체 유기와 관련된 정보들을 검색했다는 검찰의 주장도 부인했다. 남 변호사는 “졸피뎀은 버닝썬 마약 사건과 관련해 검색했고, 뼈 역시 남편 보양식 분리수거 방법이나 골다공증 등 다이어트 관련 정보를 검색하다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혈흔은 생리대와 관련된 정보를 검색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검찰과 고씨 측 주장은 계획적 살인을 증명할 졸피뎀에 대해서도 엇갈렸다. 검찰은 고씨가 범행 일주일 전 충북 청원군의 한 병원에서 졸피뎀 성분이 든 수면제를 구입했고, 신장 180㎝인 전 남편을 제압하기 위해 범행 직전 졸피뎀을 저녁 식사에 섞어 먹였다고 보고 있다. 이에 대해 고씨 측 변호인은 “(고씨에게서 압수한) 이불 혈흔에서 졸피뎀 반응이 나왔지만 이는 피해자가 아닌 고씨의 혈흔에서 나온 것”이라며 “검찰이 언론에 피해자의 혈흔에서 졸피뎀이 나온 것처럼 흘려 계획살인으로 몰아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검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 결과 검찰이 자체 감정한 이불뿐 아니라 담요에서도 피해자의 혈흔이 나왔고 졸피뎀 성분과 유전자정보(DNA)가 함께 검출됐다”고 재반박했다. 결국 재판은 양측 주장이 팽팽하게 맞선 가운데 종료됐다. 고씨 측은 검찰이 제출한 증거를 다시 검토한 뒤 내달 2일 변론을 이어가겠다는 입장이다.
살해의 원인을 전 남편에게 돌린 고씨가, 재판을 마치고 제주교도소로 이동하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고씨가 호송차량으로 올라타려 하자, 한 여성이 교도관들 사이에 있던 고씨에게 달려들어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교도관들이 서둘러 고씨를 호송차에 태웠지만, 시민들은 호송 버스 창문을 두드리며 “고유정 나와”라고 외쳤다.
제주=이현주 기자 memory@hankookilbo.com
김영헌 기자 taml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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