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부르는 삼월의 노래] <18ㆍ끝>가장 먼 곳의 독립운동- 쿠바의 동포들
“당시 집집마다 쌀로 밥을 하기 전 쌀을 한 숟가락씩 덜어서 모아두었어요. 아버지가 이것을 팔아 현금으로 만들어 은행으로 가져갔던 것이죠. 그렇게 만든 1,000달러 이상의 돈(기록에는 1,836달러)은 정말 노력하고 노력해서 만든 돈이었습니다.”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조국을 떠나 떠돌다가 정착한 이역만리 쿠바에서 모처럼 쌀밥을 지을 때면 여성들은 늘 ‘한 숟가락’의 쌀을 덜어냈다. 조국 독립의 염원을 담은 ‘쌀 한 숟가락’이었다. 쿠바의 독립운동가 임천택(1903~1985ㆍ건국훈장 애국장) 선생의 딸 마르타 림김(81ㆍ한국 이름 임은희)씨는 1921년 멕시코의 한인 노동자들이 쿠바로 건너와 형성한 한인촌의 생활을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성원을 모았던 쿠바 한인들은 대부분 이름도 남기지 못했지만, 한 숟갈씩의 마음만큼은 상하이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 선생에게 도달해 큰 힘이 됐다.
◇ ‘쌀 한 숟가락’ 운동 했던 쿠바의 한인촌 여성들
지난달 26일 방문한 쿠바의 마탄사스는 바다와 언덕들이 어우러지는 풍광으로 ‘쿠바의 베니스’로 불리는 아름다운 도시였다.
아바나에서 차로 1시간 30분 거리에 위치한 마탄사스는 1921년 3월 멕시코에서 300여명의 한인가족이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찾아 쿠바로 떠났다가 그 중 일부가 그 해 5월 31일 정착한 곳이다. 1905년 인천항을 떠나 멕시코에 도착한 1,033명의 한인들은 에네켄(henequenㆍ선박용 밧줄의 원료로 용설란의 일종이며 한인들은 ‘어저귀’라고 부름) 농장에서 일하다가 흩어지게 됐는데, 이 중 일부가 쿠바로 건너갔다.
원래 사탕수수 농장으로 가고자 했던 한인들은 공교롭게도 사탕수수 가격이 10분의 1로 폭락하며 갈 곳을 잃고 방황했다. 마침 쿠바에서도 수요가 늘어난 에네켄 농장의 노동자로 일하기 위해 마탄사스로 가게 됐다. 한인들은 마탄사스 시내에서도 4km 떨어진 엘볼로 지역에 작은 마을을 만들고 한글학교와 교회 등을 세워 함께 생활했다. 쿠바로 넘어온 한인가족 300여명 중 일부는 카르데나스 등으로 이주했다.
마탄사스의 한인촌이 있던 엘볼로 마을은 마탄사스 시내에서도 차로 10분 정도 떨어진 언덕 위에 있었다. 한인들이 떠난 지금은 한인촌을 기리는 기념비와 함께 당시 건물 5,6채가 남아 현지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곳에서 1938년 결성된 대한여자애국단 마탄사스 지부는 쿠바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자금 모집 기관이었다. 1919년 미국에서 결성된 여성 독립운동단체였던 대한여자애국단의 11개 지부 중 하나였다. 림김씨는 “여성회는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집단으로, 독립운동 자금 모집이라는 뚜렷한 목적으로 생긴 조직”이라며 “1945년 이후에는 해체됐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마탄사스 성인 한인여성이 참여했고, 마르타 림김씨의 어머니 김귀희씨는 마탄사스 지부의 단장을 지냈다. ‘쌀 한 숟가락’은 여자애국단이 가난한 생활 속에서 자금을 모으던 방식이었다. 여성들이 주도해서 모은 성금은 대한여자애국단의 고문을 맡았던 임천택 선생에게 전달돼, 아바나의 중국은행을 통해서 상하이 임시정부로 송금됐다. 대한여자애국단 결성 당시 사진에서도 19명의 여성과 함께 사진을 찍은 임천택 선생의 모습을 볼 수 있다.
1942년 백범 김구 선생이 펴낸 백범일지 하권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한 미주 지역 한인 29명의 이름이 적혀있다. 이 가운데 조국에서 가장 먼 쿠바에서 지원의 손길을 보낸 인물로 임천택과 박창운의 이름이 남아있다. 임천택 선생은 쿠바 한인들의 지도자였다.
쿠바로 넘어온 한인가족 중 더 많은 사람들이 마탄사스에서 약 50km 떨어진 또 다른 항구도시인 카르데나스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카르데나스의 독립운동 상황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이 없다.
◇두 살에 떠난 조국 잊지 않았던 지도자 임천택
특이한 점은 임 선생이 1905년 갓 두 살 때 홀어머니와 함께 한국을 떠나 조국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그의 어머니가 어린 아들과 함께 멕시코행 배를 탄 사연은 가족들도 알지 못한다. 림김씨는 “아버지가 고향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이 멕시코에서 유년시절을 보냈음에도 한국인이라는 투철한 정체성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멕시코의 한인 공동체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이민 2세대에 해당하지만 멕시코 학교를 다니지 않고 한인 커뮤니티 안에서 한국어와 스페인인어를 공부해 익혔고,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 문화에 밀접하게 생활했다”며 “쿠바 엘볼로로 이주한 이후로도 아이들에게 ‘너의 조국은 한국’이라는 강한 정체성을 심어주기 위해 한글 학교인 민성학교를 세워 한글을 가르쳤다”고 말했다. 임 선생은 한글 학교 교장을 맡고 신한민보(해외 한인 독립운동 기관 ‘대한인 국민회’의 관보) 통신원을 하는 등 한인 사회에서 전방위로 활동했다.
림김씨는 아버지가 사회 정의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아버지는 천도교 교리가 죽어서 천국을 가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를 천국으로 만드는 것에 비중을 두는 종교였기 때문에 천도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며 “하지만 1930년대 중반 천도교 지도자 최린이 일제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고 천도교와 관계를 끊었다”고 말했다.
림김씨는 또 “아버지는 미래에 대한 비전이 있었던 분”이라고 설명했다. 스스로가 끊임없이 공부하고 배움을 장려했던 그는 아홉 자녀들에게도 엄격했다. “한인촌이 가난하고 교육수준이 높지 못하니 아버지는 자녀들을 데리고 도시로 이사가 학교를 다니게 했습니다. 하지만 매주 주말은 다시 엘볼로로 돌아와 한글을 배우고 교회를 가는 등 한인촌 생활을 하게 하셨죠. 당시 한인들 가운데 처음으로 대학을 들어간 사람이 오빠(헤로니모 임ㆍ한국이름 임은조)과 언니(카멜라 임ㆍ한국이름 임은주)였어요.” 헤로니모 임은 아바나 대학을 다니다 1950년대 지하 투쟁을 통해 쿠바 혁명에 참여했고, 혁명 후 쿠바 산업부와 식량 산업부 등에서 경제 관료로 1988년까지 일했다. 림김씨도 30여년간 교단에 서며 마탄사스 종합대학에서 교육학부 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그는 마탄사스의 작지만 먼지 하나 없는 단정한 집에서 딸과 강아지 한 마리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
그는 주말마다 카르데나스를 방문해 한글학교에서 한글을 가르치기도 하고, 신한민보와 한국 잡지를 한인들에게 배달하기도 했다. 지난달 27일 카르데나스에서 만난 한인의 후손 아델라이나 김(70)씨는 “매달 임천택 선생이 와서 신문이나 잡지를 주고 가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읽곤 했다”고 말했다. 지난 달 25일 아바나의 호세마르티 한국ㆍ쿠바 문화 클럽(한인회)에서 만난 한인 후손회 회장 안토니오 김 역시 “카르데나스의 집으로 임천택 선생이 찾아와 한국 잡지와 신문을 나눠주곤 했다”고 기억했다.
임천택 선생의 마지막 과업은 1954년 쿠바의 한인 이민 역사를 조명한 ‘큐바이민사’를 펴낸 것이다. 림김씨는 “아버지는 쿠바의 한인은 모래알과 같이 적어 자신이 기록하지 않는다면 없어질 역사라고 보셨기에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사해 책을 냈다”고 말했다. 림김씨와 남편인 라울 루이스씨도 10여년의 연구 끝에 2000년 ‘쿠바의 한국인들’을 펴냈다.
쿠바의 한인들에게 한국인의 정체성을 남기기 위해 고심했던 아버지의 노력과는 달리 림김씨는 자신 세대인 3세대부터 한국인의 정체성이 옅어지고 쿠바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더욱 강해져 갔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자녀들을 어떻게든 모두 한국인과 결혼시키고 싶어 하셔서 미국에 있는 한인과 중매를 하시기도 했습니다. 제가 대학에서 만난 쿠바 남자와 결혼을 하니 아버지는 제 결혼식에 오시지 않을 정도였어요. 말년이 돼서야 제 남편 칭찬을 하셨다고 전해 들었어요.”
조국에 가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었던 임천택 선생이 한국 땅을 밟은 것은 2004년 대전현충원으로 이장 되면서였다. 두 살 때 떠난 조국을 혼이 돼서야 찾을 수 있었다.
아바나ㆍ마탄사스ㆍ카르데나스=글ㆍ사진 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백범 김구 선생은 “나의 최대 소원은 독립이 성공한 후 본국에 들어가 입성식을 하고 죽는 것이며, 작은 소망은 미주, 하와이 동포들을 만나보고 돌아오다 비행기 위에서 죽으면 시신을 아래로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짐승들의 뱃속에, 바다 가운데 떨어지면 물고기 뱃속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백범일지 하권 후기)라고 했습니다. 김구 선생이 그토록 고마워했던 미주의 최남단 동포들의 이야기로 ‘다시 부르는 삼월의 노래’는 끝을 맺습니다. 올해 1월부터 시작해 8ㆍ15광복절 즈음까지 여정이었습니다. 도움을 주신 독립유공자 후손분들, 학자분들 그리고 무엇보다 크고 작은 별로 빛나는 독립운동가분들에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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