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부르는 삼월의 노래] <18ㆍ끝>가장 먼 곳의 독립운동-쿠바의 동포들
약 80년 전 300명 정도에 불과했던 쿠바의 한인 가족들이 굶주리며 모으고 모은 돈 1,836달러. 설레는 마음으로 이 돈을 가지고 임천택(1903~1985ㆍ건국훈장 애국장) 선생이 찾았던 곳이 있다. 바로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 선생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보냈던 통로인 쿠바 아바나의 중국은행(Banco Chino)이다. 1905년 조국을 떠나 멕시코의 농장에서 일하다 다시 쿠바로 이동하게 된 노동자들은 빼앗긴 조국을 잊지 못했다.
한국일보는 쿠바 화폐박물관의 도움을 받아, 현지 취재를 통해 당시 쿠바 수도 아바나에 있던 중국은행의 주소를 확인할 수 있었다. 조국에서 1만3,000여km 떨어진 쿠바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보냈던 의미 있는 장소이다. 아마 김구 선생에게 답지한 독립운동 자금 중 가장 먼 곳에서 보낸 성원이었으리라.
임천택 선생의 딸 마르타 림김(81ㆍ한국 이름 임은희)씨가 남편 라울 루이스씨와 함께 쓴 책 ‘쿠바의 한국인들’에는 ‘1937년 10월과 1941년 사이에 에르네스토 림(임천택)은 아바나의 중국 은행을 통해 돈을 세 번 송금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 정보를 토대로 쿠바 화폐박물관을 찾았다. 세르지오 곤잘레즈 가르시아 관장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20년대 쿠바에 있던 은행은 재정이 튼튼했던 미국, 캐나다, 중국, 쿠바은행 4곳뿐이었다”며 “중국은행은 아바나 차이나타운 인근에 두 군데 있었고 중국인 커뮤니티의 송금을 담당했던 듯하다. 아마 당시 중국으로 송금을 하려고 했으면 이 은행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칼레 아미스타드 304(Calle Amistad 304), 칼레 산 니콜라스 N 513(Calle San Nicolas N 513). 그가 건넨 곳은 당시 아바나 중국은행 뱅크오브차이나(Bank of China) 두 지점의 주소였다.
한 곳은 아바나에 있는 차이나타운의 중국학교 건너편에 있었다. 지붕이 없는 민트색 낡은 단층 건물이다. 외관만 남아 있을 뿐 속은 공터이다. 지난달 29일 그곳을 찾은 기자에게 인근에 사는 중국 노인은 “(쿠바) 혁명 전까지 중국 은행이 있던 자리”라고 확인해줬다. 그곳에서 약 1km 떨어진 아바나 의회 뒷골목에 위치한 낡은 3층 건물 역시 중국은행이 있던 자리. 역시 낡고 낡은 외벽만으로는 어떤 용도인지 알 수 없었고, 현지인이 살고 있을 것으로만 추정됐다.
“돌아가신 큰 오빠 헤르니모 임이 1995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김구 선생의 생가에서 관련 자료를 보다 쿠바에서 상하이에 있는 백범 김구 선생에게 돈을 보냈다는 기록을 발견했어요. 영수증 등 증빙 자료는 전혀 없었지만, 제가 알아보니 한인촌 사람들이 십시일반 모은 돈을 아바나에 있던 중국은행을 통해 보낸 것이었습니다.” 지난달 26일 쿠바 마탄사스에서 만난 마르타 림김씨는 이렇게 회상했다. ‘쿠바의 한인들’에 기록된 송금액은 360.52달러, 618.30달러, 858.05달러로 총 1,836.87달러다. 현재 가치로 약 3만2,800달러, 약 4,000만원 상당이다.
림김씨가 기억하는 한인촌 사람들은 무척 가난하게 살았다. 에네켄((henequenㆍ선박용 밧줄의 원료로 용설란의 일종이며 한인들은 ‘어저귀’라고 부름) 노동자들은 일년에 에네켄을 추수하는 두 달 정도만 일할 수 있었고,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들도 기껏해야 석 달 정도 일할 수 있었다. 노동자들은 수확한 에네켄 잎을 한 단에 25개씩 묶어 하루 보통 10~12단을 만들었다. 그렇게 일해도 쿠바의 에네켄 노동자 임금은 하루 10페소 정도에 불과했다. 여성들은 빨래나 다림질 등으로 돈을 벌어야 했다. 임천택 선생은 주로 에네켄 잎을 묶어온 것을 트럭에 올리는 일을 했다. 림김씨는 “가난했던 그들이 그렇게 돈을 모아서 보냈다는 것을 알고 상당히 놀랐다”고 말했다. 이국 땅에서의 고된 생활도 조국 독립의 염원은 누를 수 없었던 것이다.
아바나ㆍ마탄사스=글ㆍ사진 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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