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적도의 한인들] <중> 새로 찾아낸 암바라와 의거 현장 중>
일본군 십여명 사살 ‘암바라와 의거’후 위안소 향해… 소녀들 구하려 한듯
민영학 의사 자결한 수수밭은 논으로 변해… 동지들 ‘제1차 거사’로 규정
‘왜 산에 들어가 훗일을 도모하거나, 도시로 숨어들지 않았을까, 하필 일본군 병영들 한복판에서 허망하게 죽었을까?’
고인들의 동선을 따르다 보면 누구라도 자연스레 떠오르는 의문이다. 만나는 주민마다 알아볼 정도로 2년 넘게 현장을 제 집처럼 집요하게 누빈 이태복(59) 시인은 확신한다. “조선인 위안부 소녀들을 구출하려고 했을 거예요.” 기록으로 남은 근거는 없다. 고인들이 거사 장소에서 2.2㎞ 떨어진 위안소를 약 500m 앞두고 최후를 맞았다는 사실을 들어 유추한, 심정적으로는 수긍하고 싶어지는 그만의 답이다.
극적 장치는 역사를 풍성하게 하지만 위험성도 내포한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수준을 넘어서려면 합당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당시 기록과 증언들을 취합하면 예컨대 ‘그만큼 급박했다’ ‘동료들의 도움을 받으려 했다’는 해석이 더 신빙성이 있다. 후대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역사는 그만큼 잃어버린 고리가 많다는 뜻이다. 암바라와(ambarawa) 의거 현장이 그렇다. 너무 늦게 왔다. 아니 이제라도 기억해야 한다.
암바라와 의거는 1945년 1월 4~6일 3일간 인도네시아 중부자바 암바라와 일대에서 조선인 포로감시원이던 민영학(당시 28ㆍ충북) 손양섭(24ㆍ충남) 노병한(25ㆍ강원) 3의사(義士)가 갑작스런 전속 명령에 불만을 품고 일본군 십여 명을 죽인 뒤 모두 자결한 항일 의거다. 14년 전 우리나라 국가보훈처의 현장 조사로 투쟁 현장 곳곳이 국내에 알려졌다. 자카르타에서 470㎞ 떨어진 암바라와는 한국일보 보도로 처음 실태가 공개된 ‘화장실로 변한 인도네시아 일본군 위안소(8일자 1ㆍ2면)’가 있는 곳이다.
이태복 시인이 “올해 무기고를 새로 발견하고, 일본군 병영에 얽힌 역사적 증언도 발굴했다”고 지난달 말 알려왔다. 지난 1일 그와 함께 의사들의 3일간 행적을 더듬었다. 의거를 이해하려면 서막 격인 1944년 12월 29일 사건도 알아야 한다.
이 글은 △이태복 시인을 비롯한 현지 한인사회의 연구 성과와 현지인 증언 △우쓰미 아이코(內海愛子) 무라이 요시노리(村井吉敬) 부부의 저서 ‘적도에 묻히다(2012년 번역ㆍ원제 적도하의 조선인 반란)’ △‘국외독립운동사적지 실태조사보고서-동남아지역(2005년ㆍ보훈처)’ 등을 두루 참고했음을 밝힌다. 가급적 살은 덜어내고, 눈으로 목격한 현장을 입혔다.
◆1944년 12월 29일, 스모워노(sumowono) 보병훈련장
밤 11시쯤 훈련장 취사장에서 고려독립청년당이 결성됐다. 이억관(가명 이활ㆍ33) 등 조선인 포로감시원 10명은 칼로 왼손 새끼손가락을 베어 피로 흰 천에 이름을 쓰고 몰래 연습한 당가(黨歌)를 불렀다. ‘반만 년 역사에 빛이 나련다/충의의 군병아 돌격을 해라/피 흘린 선배들의, 분사한 동지들의/원한을 풀어주자, 창을 겨눠라(1절).’ ‘아세아의 강도 제국주의 일본에 항거하는 폭탄아가 되라’ 등 세 가지 강령을 발표하고, 연합군 포로 수송선 탈취 거사 계획도 세웠다. 이후 당원은 26명으로 불었다.
이날은 정신교육 및 실전훈련을 마친 조선인 포로감시원 100여명이 소속 부대로 해산하기 전날이었다. 일본군은 훈련 종료를 자축하며 30㎞ 떨어진 살라티가 장교클럽에서 술을 마셨다. 일상적인 차별과 2년 계약이 만료됐는데도 귀국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일본에 대한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의 반발이 각처에서 탈영 등으로 표면화하자 반항 세력을 뽑아내 몇 달간 진행한 훈련이었다. 오히려 애국심과 반일 감정이 커졌다. ‘모집’이든 ‘동원’이든 그 어떤 포장을 하더라도 밑바탕은 ‘강제 징용’임을 여실히 드러내는 밤이었다. 1942년 인도네시아에 배속된 조선인 포로감시원은 1,440명이다.
암바라와에서 17.5㎞ 떨어진 중부자바의 주도(州都) 스마랑 소재 반티르 스모워노(bantir-sumowono) 보병훈련장은 본디 인도네시아를 350년간 식민 지배한 네덜란드의 병영이다가 1942~1945년 일본군이 접수했다. 현재는 청소년들의 야영장으로 쓰이고 있다. 오랫동안 네덜란드 국기가, 한동안 일장기가 걸렸을 연병장 깃대에 인도네시아 국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포로감시원들이 묵었을 막사는 학생들의 숙소로, 매점으로 변해 있었다. 고려독립청년당이 결성된 취사장엔 학생들과 가방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매점 주인도, 학생들도 옛 네덜란드 훈련장인 건 알았지만 일본군이 썼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하물며 자신들이 누운 자리의 의미를 알리 없다.
◆1945년 1월 4일, 암바라와 성 요셉 성당
오후 3시쯤 일본군이 자바포로수용소 스마랑분소 제2분견소로 쓰던 암바라와의 성 요셉 성당에서 트럭 한 대가 출발했다. 전날 싱가포르(당시 말레이반도) 전속 명령을 받은 조선인 포로감시원 6명과 일본인 인솔 하사관 등이 타고 있었다. 포로감시원들은 갑작스런 명령에 비분강개했다.
6일 전 혈맹당원이 된 손양섭 의사가 성당으로부터 8~9㎞ 지점에서 운전병에게 총을 겨누자 차가 급정지했다. “돌아가자!” 손 의사가 당원으로 포섭한 민영학 노병한 의사가 호응했고, 나머지는 달아났다. 성당 옆 무기고에서 경기관총 한 자루와 소총 세 자루, 총탄 2,000발(일본 헌병대 기록, 우리 쪽 증언은 경기관총 두 자루와 소총, 탄약 3,000발)을 탈취했다.
오후 5시 분견소장(대위) 관사를 습격했다. 이어 밤늦게까지 암바라와 시내를 돌며 일본군 군납업자와 의사(위생병), 형무소장 등을 사살했다. 죽인 숫자가 12명(우리 측) 또는 13명(일본 측)이라고 기록돼 있는데, 4명 이상인 건 확실하다. 안타까운 현지인 희생(일본이 강조)이 있었지만 3의사가 애초 일본군만 표적으로 삼은 것도 분명해 보인다.
이번에 이태복 시인이 현지인 증언을 바탕으로 새로 찾은 현장은 무기고다. 현재는 성당 바로 옆에 붙은 농업학교의 오토바이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다. 학교 사무실로 변한 관사에서 만난 교직원 수지요(50)씨는 “오래 전 일이라 아는 바 없다”고 말했다. 마을의 원로 위나르도(84)씨는 “10세 때 수수밭에서 총 싸움이 있었던 사실은 기억난다”라며 “일본군이 매주 성당에서 예배를 드리게 해줘서 관사와 무기고 위치를 알고 있다”고 전했다. 성당을 무기고 등으로 사용한 것에 대해 이태복 시인은 “연합군의 폭격을 피할 목적”이었다며 “다른 지역에서도 교회와 성당이 일본군 지휘부로 쓰였던 사실을 직접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1945년 1월 5일, 암바라와 수수밭
전날 밤부터 이어진 야음 속 거사 중에 민 의사가 왼쪽 넓적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4일 밤인지 5일 새벽인지는 확실치 않다. 이들은 일단 수수밭에 몸을 숨겼다. 이날 3의사의 행적과 대화는 그들의 순국으로 인해 남아있지 않다. “나를 포기하고 가라”고 한 뒤 민 의사가 군화 앞부분으로 방아쇠를 당겨 자결하자 남은 두 사람은 시내로 돌아가 의거를 계속했다는 설과, 두 사람이 안전한 장소나 응급 처치할 물품을 찾으러 갔다 와보니 민 의사가 자결한 뒤라 근처 위생자재창고에 숨어있었다는 설이 있다. 폭도들의 무차별 총격 반란이라고 판단한 일본군은 대규모 지원 병력을 급파한다.
공교롭게도 민 의사가 숨진 자리는 고 정서운(1924~2004) 할머니 등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10명이 머물던 암바라와 성 옆 위안소에서 500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느린 걸음으로 10분이면 닿는다. 차를 타고 멀리 달아나거나 분견소(성당) 뒤 웅아랑산(해발 2,520m)으로 피신하지 않고 굳이 일본군이 앞뒤로 포진한 분견소와 암바라와 성 사이를 택한 것이다. 의사의 피로 물들었을 수수밭은 현재 벼가 자라고 있다.
◆1945년 1월 6일, 암바라와 위생자재창고
정오 무렵 일본군이 ‘사람 키만큼 자란 수수밭에서’ 민 의사의 시신을 발견했다. 유류품도, 다른 두 사람의 낌새도 파악할 수 없었고, 사체 검증 결과 사망 후 적어도 수십 시간이 경과했다고 기록했다. 이어 오후 3시쯤 80m 정도 떨어진 위생자재창고에서 총성이 울렸다. 그곳에서 어깨동무를 한 채 자결한 손양섭 노병한 의사의 시신이 발견됐다. 7일 자결 설도 있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휘갈겨 쓴 유서 한 통이 남아있었다. ‘조선인에게 고원(포로감시원)을 모집할 당시의 조건과 현재의 실상은 너무나 큰 격차가 있다’는 문장 아래 대우와 급여 그 밖의 여러 문제에 대한 불평을 호소하고 개선 방안 강구를 요청하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두 의사가 숨진 창고 건물은 이미 헐렸고, 그 자리엔 공용 주차장이 들어섰다.
당시 작성된 공식 행정 문서인 ‘사망자 관련 사항 처리 일람표’엔 다음과 같이 기록됐다.
사망 보고: 1945년 1월 12일.
사망 통보: 1945년 1월 15일. 자살이므로 포상 자격 없음.
유골 처리: 자카르타시 일본인 묘지에 이장.
사망 사유: 군의 말레이 포로수용소 전출 명령을 회피하려 한 것이 동기. 출발 당일 도망. 이틀에 걸쳐 군인 군무원 일본인 인도네시아인 등 13명을 사살하고 3명에게 부상을 입히는 사건을 야기하고 자결.
사망 장소: 자바섬 스마랑.
사망 일시: 민영학 1945년 1월 5일. 노병한 손양섭 1월 6일.
사망 구분: 변사(자살).
다음날인 7일 소식을 전해들은 고려독립청년당 총령 이억관은 자카르타에 동지들을 모아놓고 암바라와 의거를 ‘고려독립청년당 제1차 거사’라 규정했다. 이날 추진하려 했던 연합군 포로 수송선 탈취 계획은 중간에 누설돼 중지됐다. 이어 고려독립청년당의 전모가 드러나 당원 전원이 체포됐다. 이듬해 1월 6일 고려독립청년당 주관, 재자바조선인민회 후원으로 암바라와 3의사 순국 1주기를 기념하는 합동영령제가 열렸다.
그리고 서서히 잊혀지다 2005년 보훈처의 현장 조사에 이어 2008년 민영학 의사가 인도네시아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중 처음으로 독립유공자 포상(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10여년이 흐른 지금, 3의사의 자취는 서서히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고려독립청년당은 당 선언에서 ‘희생 없이 광명은 획득할 수 없다’고 선포했다. 후대인 우리는 광명을 획득했는가, 희생까지는 아니더라도 노력을 했는가. 이정표 하나 남기지 못한 암바라와 의거 현장에서 잠시 길을 잃었다.
‘김현재 임헌근 이상문 조규홍 문학선 백문기 박창원 오은석 신경철 지주성 박승욱 변봉혁 한맹순 금인석 송병기 김춘식 김민수 김규환 김선기 신재관 김인규 안승갑.’ 아쉬우나마 나머지 고려독립청년당 26인의 이름을 밝혀둔다. 기억은 우리의 몫이다.
암바라와ㆍ스마랑(인도네시아)=고찬유 특파원 jutd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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