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층 누그러진 대일관계 발언]
“우위 부문을 무기화해선 안 돼” 日의 부당한 수출규제는 변화 촉구
문재인 대통령은 광복절인 15일 일본의 대(對) 한국 수출규제 조치를 거듭 비판하면서도 가시 돋친 반일(反日) 표현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앞선 2일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심사 우대국)에서 제외하자 “이기적인 민폐 행위” “이번에는 지지 않을 것”이라며 성토했던 것과 비교하면 목소리가 한층 누그러졌다. 그렇다고 일본 적극 껴안진 않았다. ‘협력을 통한 번영’을 거듭 강조하며 일본의 변화를 촉구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광복절 경축사에서 “지금이라도 일본이 대화와 협력의 길로 나온다면 우리는 기꺼이 손을 잡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 여권 일각에서 도쿄 올림픽 보이콧 주장이 제기된 것과 달리, “세계인들이 평창에서 ‘평화의 한반도’를 보았듯이 도쿄 올림픽에서 우호와 협력의 희망을 갖게 되길 바란다”며 유화 제스처를 보냈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평창 동계올림픽에 이어 내년 도쿄 하계올림픽,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이 잇따라 열리는 사실을 언급하며 “올림픽 사상 최초로 맞는 동아시아 릴레이 올림픽이다. 동아시아가 우호와 협력의 기틀을 굳게 다지고 공동 번영의 길로 나아갈 절호의 기회”라고 강조했다.
또 한일관계를 가로 막는 과거사 문제가 단순히 과거에 대한 단죄가 아니라는 점도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과거를 성찰하는 것은 과거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딛고 미래로 가는 것”이라며 “일본이 이웃나라에게 불행을 주었던 과거를 성찰하는 가운데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함께 이끌어가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특히 이날 경축사에는 강제징용 배상 문제와 위안부 문제 등 구체적인 과거사 문제는 한문장도 담기지 않았다. 한일이 갈등을 무작정 키워가기보단 외교적 해법을 찾기 위해 함께 노력하자는 의지를 내비친 셈이다.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는 “대일 정책 기조를 대화와 협력으로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표명됐다”며 “출구전략을 모색하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대신 이번 경축사에서 한일관계 부분은 극일(克日)과 자강에 초점을 맞춰졌다. “아직도 우리가 충분히 강하지 않기 때문에 아직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를 만들지 못했다”는 발언이 대표적이다. 문 대통령은 그러면서 “일본의 부당한 수출규제에 맞서 우리는 책임 있는 경제강국을 향한 길을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대중소 기업과 노사의 상생 협력으로 소재ㆍ부품ㆍ장비 산업의 경쟁력 강화에 힘을 쏟겠다고도 했다.
한일 갈등 해소를 위해서는 일본의 변화가 선행돼야 한다는 인식도 드러냈다. 자유무역 질서와 국제 분업을 통한 공동의 번영을 거듭 강조한 게 이런 맥락에서다. 문 대통령은 “국제 분업체계 속에서 어느 나라든 자국이 우위에 있는 부문을 무기화한다면 평화로운 자유무역 질서가 깨질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먼저 성장한 나라가 뒤따라 성장하는 나라의 사다리를 걷어차서는 안 된다”고 일본의 무역 보복 행태를 꼬집었다. 문 대통령은 “책임 있는 경제 강국으로 자유무역의 질서를 지키고 동아시아의 평등한 협력을 이끌어내고자 한다”며 한국이 동아시아에서 일본과는 다른 새로운 리더십을 만들어 나가겠다는 비전도 제시했다.
이동현 기자 nan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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