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젊은 정치] <8회> 정치 살리는 정치교육
‘그들만의 리그’ 국민적 비판에 마크롱 대통령 “모교 폐지” 선언
인터뷰ㆍ재난대비 훈련까지, 준비된 정치인ㆍ공무원 양성
"이 80명 중에 10년 뒤 대통령이 나올 것이다."
우리에겐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모교로 유명한 프랑스 국립행정학교(ENA). ENA는 “우리는 정치인양성소가 아니다. 공무원을 배출하는 그랑제콜(Grandes Écolesㆍ특수 고등교육기관)’”이라고 항변하지만, ENA 입학식을 바라보며 10년 뒤 대통령을 점치는 프랑스 국민의 시각엔 나름의 근거가 있다. 1958년 제5공화국 성립 이후 취임한 대통령 8명 중 4명을 ENA가 배출했다. 시야를 내각으로 넓히면 그 비율은 훨씬 높아진다. 이 곳을 졸업한 플뢰르 펠르랭 전 문화부장관은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현 정권 각료 중 ENA 출신은 어림잡아 70~80%쯤 될 것”이라고 추산했다. ENA를 거치지 않은 장관의 소관 부처에선 보좌진을 ENA 출신으로 기용한다. 이처럼 정관계 요직을 이 곳 출신들이 독점하는 탓에 ENA 뒤에 군주(monarch)를 뜻하는 접미사를 붙여 ‘에나크(Enarque)’라고 부를 정도다.
결국 마크롱 대통령은 이른바 ‘노란조끼’ 시위대의 사회적 불평등 해소 요구를 받아들여 올해 4월 대국민토론에서 ENA 폐지 방침을 밝혔다.
한국일보가 지난 6월 찾은 ENA는 바깥의 거센 비판에도 불구하고 평온한 분위기였다. 엘리트정치의 한계로 인해 폐지 방침까지 공식화됐지만 ENA 재학생들은 예정된 수업을 차분히 이어가며 현장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사관이나 경시청 등 주로 각 지방을 대표하는 행정기관에서 6개월 이상 인턴을 하며 고위 공무원의 일정과 언행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본다. 실제 공무원이 하는 업무도 맡아 처리한다. 캠퍼스에선 언론인터뷰부터 예산협상, 재난대비 훈련 등 행정공무원이 실무에서 맞닥뜨릴 여러 상황을 시뮬레이션하며 감각을 키운다. 2년 과정을 마치면 졸업시험 성적에 따라 정부부처 간부급 고위직 공무원으로 일한다. 일반 공무원이라면 30년 이상 근무해야 승진할 수 있는 자리다. 게다가 의무복무 기간 10년을 마친 뒤에는 대기업이나 금융기관 등으로 이직해 근무할 수 있다. 명예와 돈을 모두 거머쥐는 것이다.
ENA는 엘리트정치의 중심에 ENA가 있다는 비판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언론담당관 에디스 버거는 "전체 졸업생의 3%만이 정계에 진출한다"며 고개를 저었다. ENA에 재학 중인 시몬 라포르트(Simon Laporteㆍ30)도 이같은 우려가 오해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했다. 16세에 학업을 중단하고 10년 간 극단에서 일한 그는 국가를 위해 일하고 싶어 뒤늦게 ENA에 입학했다. “엘리트집단에 대한 우려는 실체가 없습니다. 정치인이 되는 사람은 극소수이고 대다수는 정부부처에서 공무원으로 일합니다. 엘리트와는 거리가 먼 저도 ENA에 다니고요.”
그러면서도 비판의 핵심인 ENA 동문의 네트워크를 부인하진 않는다. 오히려 이 네트워크가 프랑스 사회에 긍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반론을 편다. 로빈 루드브룩 라타작(Robin Ludbrook-Ratajczak) ENA 언어학 교수는 “한국과 중국, 일본은 물론 독일, 이탈리아에서 ENA에 입학하길 원하는 이유는 탄탄한 네트워크 때문 아니냐”고 되물었다. “고위관료가 전화 한 통으로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업무효율 측면에서 긍정적입니다. 동문들의 네트워크를 무작정 안 좋게만 볼 것은 아닙니다.” 올해 가을학기 국제과정 입학을 앞둔 이진문 주프랑스대한민국대사관 수석서기관도 향후 프랑스 요직에서 일하게 될 ENA 재학생들과 좋은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위해 입학시험과 인터뷰 등 어려운 관문을 뚫었다.
프랑스 엘리트정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어 ENA의 운명은 불확실하다. 파리정치대학과 ENA로 이어지는 정치 엘리트코스를 통하지 않은 정치신인들이 대거 수혈되고 있는데다 국민이 낸 세금을 투입해 가며 ‘그들만의 리그’를 유지하는 게 옳으냐는 비판이 날로 거세지고 있어서다. 프랑스 녹색당 소속으로 도의원과 시의원에 출마했던 마리 프랑수아 다라(67)도 “엘리트주의는 사회적 통합을 방해할 뿐 아니라 인간적이고 개인적인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게 만든다”고 우려했다. 20년차 이민자인 같은 당 정운례씨도 “다양한 성장 배경과 계층의 목소리를 대변하지 못한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엘리트정치를 바라보는 회의적인 시각에도 철저히 훈련된 인재가 실무에서 힘을 발휘하는 긍정적인 점은 새겨볼만 하다. 플뢰르 펠르랭 전 문화부장관은 "ENA가 아니었다면 정치인맥이 전혀 없던 제가 장관이 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자신을 동일한 출발선에 세워준 ENA를 변론했다. "저는 파리정치대학(SciencesPo)과 ENA를 통해 현장에서 매우 유용한 지식과 실무능력을 많이 익혔습니다. ENA에서 배운 법률과 다양한 분야의 행정지식 덕분에 정책을 만들고 결정하고 시행할 때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펠르랭 장관은 너무 테크노크라트야' 하는 비판도 받았지만, 실무기술을 갖고 있어서 (장관직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15년 간 ENA에서 강의한 루드부룩 교수는 폐지 위기를 ENA가 한 걸음 더 발전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가 이 곳에 있는 동안 3년에 한번 꼴로 개혁이 단행됐습니다. 1947년 문을 열었을 당시와 지금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개혁이 있을 때마다 조금씩 변했고 빠르게 바뀔 때도 있었습니다. 어떤 개혁이든 ENA에 큰 발전이었습니다. (이번에도 개혁이 성공해) 국민을 위해 일할 미래의 공무원이 이 곳에서 계속 양성되길 소망합니다.”
파리ㆍ스트라스부르=글ㆍ사진 박지연기자 jyp@hankookilbo.com
조희연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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