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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성 평등史의 첫 장, 김대중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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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성 평등史의 첫 장, 김대중이 있었다

입력
2019.08.19 04:40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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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법 개정안 통과 등 제도 초석, 여성 인재 발탁… “아내 덕분에 인류의 반쪽 찾아” 고 이희호 여사에 공 돌려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빈소가 마련된 신촌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에서 시민들이 조문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빈소가 마련된 신촌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에서 시민들이 조문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어머니의 권리를 아버지와 같게, 아내의 권리를 남편과 같게, 딸의 권리를 아들과 같게, 가족법을 개정해야 합니다!” (1987년 김대중 당시 평화민주당 대선 후보 유세 중)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투철한 민주주의자인 동시에 페미니스트였다. 차별 받지 않는 시민, 주권자의 권리 앞에 성별이 따로 없기에 ‘여성 운동은 곧 민주화 운동’이라고 생각한 까닭이다. 여러 ‘성평등 제도’의 초석을 놓는가 하면, 유능한 여성 인재를 과감하게 키우는 ‘발탁의 정치’는 정계에 숱한 밀알을 뿌렸다.

김 전 대통령이 13대 국회의원으로 일하며 가장 공들인 것 중 하나는 ‘가족법 개정안’의 통과다. 여야 영수회담 때마다 가족법 개정을 촉구하고, 동료 의원을 설득한 끝에 1989년 비로소 남녀 차별 없는 유산 상속이 처음 가능해졌다. 집권 이후 국민의 정부에선 여성사에 족적을 남긴 ‘최초’의 장면이 더 많았다. 정부 출범과 동시에 대통령 소속 여성특별위원회가 설립됐고, 다음 해 남녀차별금지법이 생겼다. 가정폭력방지법과 남녀차별금지법이 시행된 것도, 영부인을 ‘여사’로 바꿔 부르기로 한 것도, 공직자에게 임명장 줄 때 배우자를 초청하기 시작한 것도 국민의 정부 시절이다. 2001년에는 최초로 정부 조직으로 여성부가 신설됐다. ‘성 평등이 실현되면 없어질 시한부’ 부서로 출범한 여성부는 아직 ‘임무 완수’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청와대 사상 첫 여성 총무비서관(박금옥), 첫 여성 홍보수석(박선숙)이 배출됐고, 첫 여성 노동부 차관(김송자)도 탄생했다. 국군 창설 53년 만의 첫 여성장군(양승숙 대령), 경찰사상 첫 여성 경찰서장(김강자 총경)이 배출된 것도 DJ 정권에서다.

여성 의원들을 요직에 전진 배치한 것도 이목을 집중시켰다. 추미애 당시 의원을 총재비서실장, 이미경 당시 의원을 제4정조위원장에 나란히 임명한 것은 물론, 전당대회에서 5석에 불과한 지명직 최고위원 중 한 자리를 신낙균 당시 의원에 할당한 것은 보기 드문 용단이었다. 김 전 대통령이 재임 중 새정치국민회의 의원이나 당무위원과 만나 “획기적인 공천제도”를 주문하고 “여성 30% 할당제” 당부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실제 새천년민주당은 16대 총선에서 비례대표의석의 30%를 여성에게 공천한 유일한 정당이다.

눈에 띄는 여성 당직자들을 ‘파격 발탁’하는 데도 망설임이 없었다. 더불어민주당 3선 의원으로 있다가 현 정부 들어 장관으로 발탁된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대표적이다. 1987년 당보기자로 당무를 시작한 김 장관은 정세분석실장으로 일하다, 보고서를 눈 여겨 본 김 전 대통령의 발탁으로 세 계단 앞지르는 승진을 거쳐 부대변인으로 활약하며 이름을 알렸다. 김 장관은 “DJ는 늘 눈에 띄는 젊은 당직자들에게 큰 역할을 주고 출마를 권했는데 이런 ‘젊은 일꾼 수혈론’ 앞에 남녀가 따로 없었다”며 “여성의 정치 진출이 더 활발해야 한다고 본 DJ의 노력이 없었다면 아직도 갈 길이 멀긴 하지만 여성 의원 비율이 지금(17%)보다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 정부에서 김 장관 외에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강경화 외교부 장관,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등 여성 인재들이 주요 부처 장관을 맡아 활약하고, 이낙연 국무총리를 잇는 후임 총리로 여성 후보가 구체적으로 거론되고 있는 것은 김 전 대통령이 20년 전 뿌린 밀알이 결실을 맺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게 정치권의 대체적 평가다.

이런 ‘페미니스트 김대중’을 만든 건 팔할(八割)이 한국 여성인권운동의 문을 연 고 이희호 여사였다. 물론 ‘이희호 없는 김대중은 상상하기 어렵다’는 세평에 이 여사는 늘 손사래를 쳤다. 이 여사는 생전 “내가 어떻게 하자고 권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본래 그가 여성 차별을 하지 않았다”(‘이희호 평전’ㆍ한겨레출판 발행)고 말했다.

영원한 동반자, 동역자, 동행자로 한 길을 걸은 부부는 여기서만큼은 생각이 달랐다. 서로에게 공을 돌리느라 바쁜 탓이다. 김 전 대통령의 생각은 생전 글에 담겨 있다. “내가 여성에 대한 전통적인 비하와 멸시의 관념으로부터 해방되고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로서 여성을 대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아내의 도움 때문이다. 아내 덕분에 나는 인류의 나머지 반쪽을 찾을 수 있었다.”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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