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은 ‘사고 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수요일 격주로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육지와 동떨어진 섬, 제주에는 고유한 가옥 문화가 있다. 과거 유교의 영향으로 남녀의 공간을 안채와 바깥채로 구분했던 육지와 달리 제주에서는 안거리(안채)는 부모가, 밖거리(바깥채)는 자식 부부가 사용해 세대별로 구분했다. 이동하기가 어렵고, 척박했던 섬 생활의 특성상 함께 살되 독립적인 가족 형태를 유지하는 삶의 방식이었다. 시간이 지나 부모가 연로해지면 자연스레 자식이 집을 물려 받고, 제사 등 집안의 대소사를 관장한다. 제주에서 집은 부동산 투기 대상도, 단순한 주거 공간도 아닌 대대손손 이어져 온 가보이자, 가족의 삶 자체였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신준호(42ㆍ개인사업)씨도 줄곧 삼양동의 단층집에서 살아왔다. 집은 30여년 전 그의 부모가 지은 곳이었다. 7년 전 결혼하면서 안거리(100㎡ㆍ약 33평)에서 밖거리(33㎡ㆍ10평)로 독립했다. 셋째가 태어날 무렵인 2017년 부모는 아들에게 새 집을 지으라고 땅(342.5㎡ㆍ약 104평)을 내주었다. 아들 내외와 세 손주(6세ㆍ4세ㆍ2세)가 살기에 밖거리는 좁고 허름했다. 신씨는 “아이들이 나처럼 집과 관련한 추억을 쌓으면서도 부모님이 쾌적하게 지낼 수 있는 ‘우리집’을 짓고 싶었다”고 했다. 지인의 소개로 서울에 이름난 건축가(푸하하하프렌즈 건축사사무소)를 제주도까지 불러들였다. 부부는 건축가에게 제주 전통 가옥처럼 부모님, 부부, 세 아이의 공간 등 세대별로 공간이 뚜렷하게 구분해 줄 것을 부탁했다. 세 번의 설계 변경 끝에 ‘세거리 집’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세거리 집’은 집 앞 길이 세 갈래로 나뉘어져 세거리이기도 하지만, 안거리(부모 공간)와 밖거리(부부 공간), 모거리(별채ㆍ세 아이 공간)를 뜻하기도 한다. 3대의 집은 지난해 11월 완공됐다.
◇세대별로 나뉜 3채 같은 한 채
집은 한 채지만 조부모, 부모, 자녀 등 세대에 따라 크게 세 개의 공간으로 나뉜다. 길이 15m 직사각형의 건물을 절반으로 잘라 조부모와 신씨 부부의 집으로 나눴다. 두 공간은 현관도 따로 있고, 내부로 연결되지 않는다. 부부의 집은 다시 1, 2층으로 구분된다. 1층은 세 아이의 놀이 공간과 방이 있는 아이들의 공간이다. 2층은 부부의 공간이다. 1층 놀이 공간은 아이들이 집 앞, 뒷마당을 오가며 마음껏 뛰놀 수 있게 통로처럼 놓여 있다. 놀이 공간 옆에 세 아이의 방이 일렬로 배치됐다. 세 개의 방에는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이 하나씩 달려 있다. 채광에도 용이하다. 지금은 아이들이 어려 두 방을 하나로 텄다. 1층이 아이들의 공간이지만, 거실 층고를 4m로 높여 부부가 2층에서 아이들을 볼 수 있게 보이드(Voidㆍ오픈 천장)로 만들었다. 설계를 맡은 한양규 푸하하하프렌즈 건축사사무소 소장은 “덥고 습한 제주의 기후 특성상 제주 전통 가옥은 바람이 잘 통하고, 환기가 잘되도록 거실을 중심으로 양옆에 방을 두고, 통로처럼 앞뒤를 열어 두는 형태였다”고 설명했다.
조부모의 집도 통로 양옆에 방을 뒀다. 현관에 들어서면 뒷마당으로 이어지는 뒷문이 마주하고 있다. 우측에는 부부의 각 방이, 좌측에는 주방과 욕실이 날개처럼 달렸다. 조부모의 집은 2층이 따로 없다. 100㎡(약 30평) 규모의 안거리에서 거주하던 조부모의 공간은 33㎡(10평)으로 줄었다. 신씨의 부모는 “나이 든 우리는 집이 크면 오히려 집안일이 많아 번잡하다”며 “애들이 많은 아들 내외가 공간이 더 필요하다”고 통 큰 양보를 했다. 크기는 줄었지만 거동이 불편한 조부모에 맞춰 낮은 욕조가 설치됐고,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버리지 않는 그들을 위해 수납 공간도 최대로 확보해 생활은 편리해졌다.
비바람이 거센 제주의 집은 주로 단층집이었다. 단층집에서만 살아온 신씨는 집 위에서 바다를 보고 싶은 작은 바람이 있었다. 그의 바람을 들어주려고 건축가는 2층을 올렸다. 대신 층고를 낮춰 밖에서 보면 단층집 같다. 2층에는 주방과 거실, 정원 등 공용 공간과 전망대 같은 작은 정원이 딸린 부부의 방이 있다. 주방의 긴 창으로 집 맞은편의 소나무 숲인 오름(원당봉)이 그림처럼 들어온다. 1층이 앞뒤로 트인 반면 2층은 뒤가 막혀 있다. 대신 거실 위에 천창을 내고 양옆에 정원을 만들어 영리하게 채광과 풍경을 확보했다. 가로ㆍ세로 1.5m가 넘는 정사각형 구조의 천창으로 빛이 쏟아진다. 부부의 방에 딸린 정원으로 올라가면 외부의 시선을 피해 바다를 감상할 수 있다. 반대편 주방 옆 정원은 야외 바비큐를 하거나, 풀장으로 활용한다. 신씨의 아내 김설희(39)씨는 “바깥에서 보면 집이 답답해 보인다고 하는데, 정작 집 안에 있으면 창이 많아서 시원하고 열려 있어 전혀 답답하지 않다”며 “2층에 있으면 오름, 바다, 햇빛, 구름 등을 집 안으로 들인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집이 오래된 것처럼 편안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내는 데는 합판의 힘이 컸다. 건축가는 합판으로 벽을 세우고, 가구도 합판으로 제작했다. 조부모는 싸구려 소재라며 타박했고, 지인들은 아직 마감이 덜 된 것 아니냐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한 소장은 “돌과 흙, 나무 등 외부의 자연소재를 활용하고 싶었는데, 나무를 얇게 저미듯 눌러 만든 합판은 가벼우면서도 따뜻해 보여 집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공용공간은 합판으로 마감했지만, 각 방은 깨끗하게 페인트로 칠했다. 열린 공간에서 닫힌 공간으로 들어오는 느낌을 주면서 공간을 구획하기 위해서다.
◇집은 달라졌지만 삶은 그대로
제주에 있는 집이라면 현무암이 층층이 쌓인 돌담이나 감귤이 주렁주렁 달린 귤나무 한 그루쯤은 있을 법한데 ‘세거리 집’에는 그런 흔한 모습이 없다. 제주 토박이 부부는 “현무암이나 귤나무는 제주 어디에나 있어서 굳이 집에까지 들이지 않아도 된다”며 “오히려 편안하고 따뜻함을 주는 재료로 가족들이 생활하기에 불편함이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주위 단층집처럼, 풍경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1층은 따뜻한 붉은 벽돌로, 2층은 콘크리트에 입자가 고운 페인트 스프레이를 뿌렸다.
단조로운 외형에 변화를 주는 건 홍송 살문(나무로 뼈대를 촘촘히 세워 만든 문)이다. 유리 현관문과 쪽마루 앞에 비바람을 차단하기 위해 만든 살문은 열리고 닫히면서 집에 표정을 만든다. 한 소장은 “원래 제주 전통 가옥은 대문이 없었다”며 “대문이 없는 대신 비바람이 집으로 들이치는 것을 막고, 가족의 안전을 위해 덧문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집은 변했지만, 살아온 삶은 계속된다. 신씨는 “집의 형태는 달라졌지만,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며 “내가 이곳에서 나고 자라고, 세 아이를 낳아 가정을 이룬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부모님의 공간을 내가 쓰게 되고, 내 아이들이 내가 쓰던 공간을 쓸 거고, 그렇게 추억이 쌓이면서 삶이 이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아이들이 앞으로의 삶을 버텨낼 아름다운 추억이 많은 집이 되고 싶다고도 했다. 육지에서 숱한 주택을 설계한 한 소장도 “보통은 집이 바뀌면 사는 이들의 삶이 달라지고, 집에 맞춰서 삶이 바뀌기도 하지만, 이곳에서는 건축주 가족이 원래 살아온 방식 그대로 사셨으면 좋겠다”라며 “집의 형태에 상관없이 이곳에서 쌓인 추억은 오롯이 가족들의 것”이라고 말했다.
제주=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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