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내부까지 쫓아가 구타, 실탄 경고사격도
“내 눈을 돌려달라.”
홍콩 행정장관(정부수반) 직선제가 무산된 지 꼭 5년째 되는 8월 31일 낮12시30분쯤, 번화가인 완차이역 부근 서던축구장에 집결한 수천 명의 인파가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지난 시위에서 오른쪽 눈이 다친 여성을 상징하는 구호였다. 이들은 “Sing hallelujah to the lord(신은 이 세상의 권력자)”라는 노래를 부르며 “신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한다. 캐리람(林鄭月娥)과 시진핑(習近平)은 아니다”라고 외쳤다. 딱히 주도하는 사람 없이 아무나 ‘홍콩인’이라고 선창하면 다같이 ‘힘내라’고 화답하며 분위기를 이어갔다. 저마다 손에는 오른 눈이 빨갛게 칠해진 캐리람 장관에 반대하는 피켓을 들고 있었다.
이날 행사는 50~60대가 주축이 된 ‘홍콩의 죄인을 위해 기도하자’라는 기독교 모임이 주관했다. 지난 6월 9일 이후 13주째 반정부 시위를 주도해온 민간인권진선(민진)이 도심 집회를 예고했지만 경찰이 금지하면서 종교단체가 총대를 맸다.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룬 영화 ‘택시 운전사’를 인상 깊게 봤다는 60대 남성은 “한국의 투쟁을 존경한다”면서 “내 나이가 많지만 경찰에 체포되더라도 두려움 없이 항상 다른 사람들과 함께할 것”이라고 말했다. 집회 도중 경찰 10여명이 축구장 안으로 들어서려다 반대하는 인파에 밀려 얼굴을 내밀지도 못하고 도망치듯 쫓겨 나가는 진풍경도 연출됐다.
이들은 오후1시30분쯤 집회 장소를 벗어나 찬송가를 부르며 지하철 두 정거장 떨어진 차터가든으로 향했다. 당초 민진이 집회를 신고했지만 거부당한 장소였다. 거리 행진 도중 경찰이 드론을 띄우며 감시를 강화하자 상공을 향해 야유를 퍼부었다.
인파 속을 먼저 빠져 나와 차터가든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부의 불허방침이 아니라면 오후2시30분부터 집회가 시작될 터였다. 하지만 체포될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미 1,000여명의 시민들이 이심전심으로 모여 있었다. 그 한복판에 휠체어를 타고 앉아 있는 50대 여성에게 다가갔다. 그는 ‘사람들이 몰리면 위험하지 않겠느냐’고 묻자 “홍콩 시민으로서 공공장소에 오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며 “내가 왜 집에 돌아가야 하나, 위험한 건 경찰인데”라고 답했다.
한 켠에는 마스크를 낀 앳된 표정의 소년 3명이 두리번거리며 사람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16살 친구들(우리의 고등학교 2학년)이라고 했다. 진(陳) 군은 “인터넷을 통해 1980년에 광주에서 벌어진 일을 알고 있다”며 “만약 충돌이 발생하면 시민들을 보호하러 온 것”이라고 당차게 말했다. ‘민진이 오늘 집회를 취소한 것 아니냐’고 묻자 “민진과 상관없이 자발적으로 왔다”면서 “시민의 권리를 보호해야 하는 정부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옆에서 잠자코 지켜보던 50대 남성이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더니 “내달 2일이 개학인데 400여개 중고등학교 가운데 이미 160여개가 휴업을 하기로 했다”면서 “어린 학생들도 시민의 힘을 보여줄 것”이라고 치켜세웠다.
오후2시30분, 길 건너 성요한 성당의 종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하얀 사제복을 입은 남성이 “죄인 캐리람을 심판하러 가자”고 외쳤다. 이에 시민들은 “와”하고 소리치면서 너나 할 것 없이 차터가든을 빠져나가 거리로 향했다. 마침 완차이에서 몰려온 인파와 뒤섞여 이들은 법무부가 있는 정부청사를 지나 행정장관 관저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때 정면에 경찰 30여명이 나타났다. 일부는 방탄복을 입은 무장차림이었다. 이들은 미국영사관으로 향하는 길목을 봉쇄하고 있었다. 이에 시민들과 코앞에서 마주하며 한동안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흘렀다. 경찰은 “당신들은 법을 어겼으니 해산하지 않으면 체포하겠다”고 엄포를 놓았고, 시위대는 “더러운 경찰, 수치스럽다, 눈동자를 돌려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오후3시, 갑자기 폭우가 쏟아진데다 시위대가 수만 명으로 불어나 뒤섞이면서 긴장수위가 더 높아졌지만 경찰이 행진 경로를 차단하지는 않고 지켜보면서 물리적 충돌은 피했다. 아까 만난 50대 여성도 인파 속에서 휠체어를 타고 미소를 지으며 옆을 지나갔다.
오후4시, 세를 확인한 시민들은 대로를 가득 메우며 홍콩 주재 중국 연락판공실(중련판)로 향했다. 당초 민진이 이날 시위에서 최종 타깃으로 삼은 장소다. 차터가든 인근 센트럴역을 지날 즈음 인파는 이미 수십만 명을 족히 넘어섰다. 시민들이 펼친 대형 현수막에는 ‘공산당 믿어요? 바보야’라는 구호와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를 독일 나치에 빗대 ‘CHINAZI(차이나치ㆍ차이나+나치)’라고 적혀 있었다.
행진 대열에 합류했다. 시위대는 “Stand with Hong Kong, Fight for freedom(홍콩과 함께, 자유를 위해 싸우자)”라고 외쳤다. 그때 수염을 기른 한 남성이 태극기와 미국 성조기를 양면으로 붙인 독특한 깃발을 들고 인파를 향해 “Who’s House?(누구의 집인가)”라고 거듭 물었다. 홍콩은 중국이 아니라는 의미다. 홍콩에서 학생들에게 경제학을 가르친다는 패트릭(34)은 깃발에 대해 묻자 “한국과 미국이 동맹이라 더 힘이 센 것처럼 홍콩 시민들도 혼자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이에 기자와 함께 걷던 시민들은 “한국 고맙다”라고 연발하며 “우리도 반드시 해낼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오후4시30분, 시위대의 발길이 멈칫했다. 중련판 앞에 2대의 물대포차와 3대의 장갑차, 수백 명의 무장경찰이 촘촘하게 진을 치고 있었다. 그곳까지 가봐야 별 소용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시위대는 다시 센트럴과 완차이 중간에 위치한 입법회(우리의 국회)로 목표를 수정했다. 시민들의 거센 물결이 방향을 바꿔 우르르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 사이 시민들에게 마스크를 나눠주던 남성 7명이 경찰에 체포됐다.
오후5시, 입법회 건물에 내건 깃발이 검은색으로 바뀌었다. 최고수위의 경고표시다. 방독면과 마스크를 낀 시위대 수천 명이 몰리면서 경찰은 최루탄과 물대포를 쏘며 맞섰다. 하늘에는 헬기의 굉음이 귓가를 때렸고, 소방차 수십 대가 입법회 주위를 돌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을 좀더 가까이에서 지켜보려 홀린 듯 앞으로 걸어갔다. 저만치 이미 최루가스가 뿌연 연기를 뿜어냈고, 시위대를 향해 물대포를 난사했다. 심지어 파란색 염료가 섞인 물줄기도 뿜어 나왔다. 시위 참가자를 가려내기 위한 조치다. 이에 맞서 시위대는 새총을 쏘고 벽돌을 던지기도 했다. 시민들은 전진했다가 뒤로 물러서길 반복하면서도 호락호락하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때 대여섯 명의 시민들이 기자의 앞을 막아섰다. 방독면을 쓰지 않아 위험하다는 것이다. 매캐한 냄새를 전혀 의식하지 못했는데 그제서야 최루탄 가스가 식도를 타고 몸 속으로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화염병을 옷 안에 숨겨 경찰을 향해 뛰어가던 한 남성은 기자와 눈이 마주치자 오히려 거칠 것이 없다는 당당한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입법회를 향해 늘어선 수백 명의 시위대는 손과 손으로 헬멧을 비롯한 각종 보호장구를 경찰과 충돌하고 있는 최전방 선봉대에게 넘겼다. 입법회로 향하는 메인 도로 외에 주변도로 곳곳에서도 시민 수십만 명이 몰려들어 구호를 외치고 바닥을 두드리며 시위대에 힘을 실어줬다.
오후7시가 넘어 날이 어두워지자 경찰이 구축한 바리케이드에 불이 붙어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시위대가 화염병으로 맞서며 마지막 공격을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근처에 있던 소방차가 바로 출동해 불을 끄면서 큰 인명피해는 없었다. 오후8시가 지나자 시위대는 대부분 해산했다. 다만 밤11시쯤 홍콩섬에 위치한 입법회와 한참 떨어진 주룽(九龍)반도의 프린스에드워드역에서는 경찰이 귀가하는 시위대를 지하철 내부까지 쫓아가 구타했고, 2주전 170만명이 운집한 빅토리아 공원에서는 경찰이 허공을 향해 실탄 경고사격을 하면서 또다시 논란이 일었다. 이날 시위가 홍콩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홍콩 도심 속 8월의 마지막 날은 그렇게 격렬하게 저물고 있었다.
시위대는 9월1일 홍콩국제공항으로 향하는 도로에서 자동차를 중간에 세워 놓는 식으로 차량 통행을 막는 정체 유발 시위에 나설 예정이다. 법원 판결과 당국의 조치로 공항을 직접 점거하는 시위는 더 이상 불가능해진 탓이다. 중고등학교 개학과 대학 개강이 몰린 2일에는 파과((罷課ㆍ동맹휴학)과 파업, 파매(罷買ㆍ중국 관련 업체 불매운동) 등 ‘3파’를 통해 시민들의 힘을 다시 결집할 계획이다. 이날 시위를 앞두고 홍콩 사태 발생 이후 처음으로 경찰이 대규모 도심 집회를 금지하며 안간힘을 썼지만, 사방에서 물줄기가 흘러 들어 바다를 이루듯 하나 둘 모인 시민들의 열망이 다시 폭발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홍콩의 여름이었다.
홍콩=김광수 특파원 rollings@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