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세대 물려줄 100년 후 ‘보물’ 서울미래유산
불황에 폐업, 개발논리에 철거… 18곳 사라져
“결국 폐차장으로 버스를 견인해 가는데, ‘끼익 끼익’ 나는 소리가 우는소리처럼 들렸다. 끌려가는 버스를 보면서 나도 하염없이 울었다.” 하민지(34)씨는 가족이 함께 운영하던 ‘콜럼버스 스낵카’의 최후를 이렇게 기억했다. 버스를 개조한 이동식 식당 ‘스낵카’는 여의도와 강남 개발 붐이 일던 1970~80년대 전국에서 몰려온 건설 인부들의 식사 문제를 해결한 주인공이다. 이종원 한국버스연구회 대표에 따르면 콜럼버스 스낵카는 1985년 아시아자동차가 스낵카 용도로 생산한 13대의 ‘AM907’ 모델 중 하나로 희소성도 상당했다. 그해 서울 관악산 입구에 자리 잡은 이후 콜럼버스 스낵카는 추억의 명소로 각광받으며 드라마와 영화 등에 여러 차례 등장하기도 했다.
서울시는 개발 시대의 역사와 추억을 간직한 콜럼버스 스낵카를 2015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신림 경전철 공사가 시작됐고, 하씨 가족은 퇴거 통보를 받았다. 하씨는 “스낵카는 역사를 담은 콘텐츠이자 제 꿈이었다. 어떻게든 살려 보고 싶어 여러 차례 서울시에 찾아가 이전을 도와달라고 호소했지만 ‘방법이 없다’는 말만 되돌아왔다”고 말했다. 32년을 이어 온 추억의 유산은 2017년 9월 고철 값 40만원이 매겨진 채 폐차장으로 끌려갔고, 그 자리엔 공사용 울타리가 둘러쳐졌다.
미래세대에 물려줄 ‘100년 후의 보물’이라는 서울미래유산이 속절없이 사라지고 있다. 서울시가 2013년부터 정치와 역사, 문화 예술, 시민생활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460여개의 미래유산을 지정해 오는 동안 18곳이 폐업 또는 멸실했다. 이 중 12곳이 자영업 점포이고 공공기관 건물이나 문화예술인의 가옥도 사라졌다. 자영업 점포의 폐업 이유는 대부분 영업 부진이었는데, ‘서울미래유산’ 타이틀도 냉정한 현실 앞에선 도움이 되지 않은 셈이다. 폐업 위기에 내몰린 업주들 입장에선 선정만 해놓고 필요할 때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는 불만이 적지 않다.
이에 대해 서울시는 4일 “미래유산의 보존은 소유주의 자발적 의지에 따르는 것이 원칙이므로 환경 변화나 소유주의 상황에 따른 폐업ㆍ멸실에 대해 시가 직접 보존 및 관리에 나서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 “다만 미래유산의 본래 기능을 유지하고 관리될 수 있도록 소규모 수리나 환경 개선에 필요한 예산 지원을 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서울시의 노점상 정책이 미래유산으로 선정된 점포들을 되려 힘들게 만든다는 시각도 있다. 명동에서 70년 전통의 음식점을 운영하다 지난해 폐업한 윤모(63)씨는 “시에서 노점을 허가하는 바람에 길거리에 관광객들만 북적거리고 명동 상권 자체가 도떼기시장처럼 변해버렸다. 오래된 맛집을 기억하는 세대들이 발길을 돌리는데 무슨 수로 장사를 하겠나”며 “폐업 당시 임대료가 7~8개월 치가 밀렸고 당장 직원들 월급 주기도 힘들었다”고 말했다.
윤씨 점포가 있던 자리엔 현재 옷 가게가 들어서 있지만 서울시는 4일까지 폐업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용산구 남영동에 위치한 중화요리점 ‘덕순루’ 역시 지난해 가을 이후 문을 닫았지만 서울시로부터 입수한 폐업 목록에서는 빠져 있다. 1959년부터 60년을 이어 온 점포 자리엔 현재 ‘서울미래유산’ 동판과 함께 ‘임대문의’ 안내문이 붙어 있을 뿐이다. 서울시 문화정책과 관계자는 “서울미래유산은 소유주가 폐업이나 멸실, 이전 등 변동 사항을 시에 고지할 의무가 없다 보니 변동 사항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서울시가 선정한 미래유산이 서울시에 의해 철거, 멸실된 황당한 경우도 있다. 구 TBS교통방송 본사와 서울시청 도시안전본부 청사는 국가권력에 의해 인권유린이 자행된 남산 중앙정보부 건물군에 속한다. 두 건물은 시대의 아픔을 간직한 네거티브 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미래유산으로 선정됐지만 남산 주변에 도심공원을 조성하는 ‘예장자락 재생사업’으로 인해 2016년 철거되고 말았다.
이 밖에 오랜 세월 시민의 곁에 머물다 사라진 미래유산들을 수소문해 찾아가 보니 시대의 급속한 변화로 인해 자취마저 희미해져 있었다. 1949년 개업 후 3대를 이어 오다 2015년 폐업한 서울 성북구 길음동의 불고기 전문점 ‘옥돌집’ 자리엔 봉제공장이 들어서 있었다. 건물 외벽엔 옥돌집 간판만이 유적처럼 남아 있다. 1969년부터 서울 북촌에서 영업을 해 온 ‘중앙탕’은 현재 한 안경 브랜드의 플래그십 스토어로 변모해 있었다. 목욕 문화의 변화와 24시 사우나에 밀려 차츰 잊히던 서울 구도심의 대표적인 대중목욕탕은 2014년 결국 사라졌다. 가정집으로 사용되던 시인 노천명의 가옥 역시 소유자에 의해 매각된 후 리모델링 공사를 거쳐 한옥체험 게스트하우스가 들어섰다. 게스트하우스 대표 김초롱(31)씨는 “옛 가옥의 역사와 의미를 새겨 건물 이름을 ‘시인의 집’으로 지었다”고 말했다.
박서강 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김주영 기자 will@hankookilbo.com
윤소정 인턴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