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고생이 있다.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이모 집에 얹혀 구박 받으며 콩쥐와 같은 삶을 살아간다. 그러다 신분 상승 제대로 시켜주는 아저씨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부유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위도 갖추고 있다.
3년 전 흥행했던 드라마 ‘도깨비’ 내용이다. 한국 TV와 영화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신데렐라 스토리를 대표하는 설정 몇 가지가 있다. 남자 주인공은 회사 내 본부장 또는 이사 직급을 갖고 있거나 재벌 2, 3세다. 여자 주인공은 물질적으로 부족한 가정 환경에서 자랐지만, 밝고 눈치 안 보는 성격으로 남자 주인공의 관심을 끌 수 있어야 한다.
이랬던 한국 드라마, 영화가 차츰 변화하고 있다. ‘귀신’, ‘1,000세 먹은 주인공’ 등 드라마 도깨비와 비슷한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성 역할을 전환시켜 ‘여자 도깨비’로 주목 받은 작품이 있다. 여성 주인공의 사회적 성취와 성 역할이 반전된 남성 조연들, 같은 형사물이어도 남녀 성 역할을 바꿔 여성 관객들로부터 호응을 끌어낸 영화까지 작품도 다양하다.
◇호텔 델루나
‘호텔 델루나’는 영혼들이 투숙하는 호텔에서 사장 장만월(이지은)과 호텔리어들에게 일어나는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다. 지난 1일 시청률 13%를 기록하며 자체 최고 시청률과 올해 tvN 드라마 최고 시청률을 바꾸며 인기리에 방영을 마쳤다.
호텔 델루나는 주인공의 사회적 지위부터 3년 전 인기 드라마 도깨비와 달랐다. 호텔을 경영하는 사장은 여성 장만월이다. 그녀와 그녀가 직접 임명한 지배인 구찬성(여진구) 사이의 권력관계는 확연히 차이가 있다. 보통 드라마에서 남성들만 사회적 지위를 갖췄고 여성들은 보조적 역할이었던 것과는 다르다. 장만월은 까칠한 성격으로 구찬성을 괴롭히기도 하고, 억울하게 죽은 귀신들을 대신해 무서운 복수를 해주기도 한다. 미디어 속 여성 인물이 폭력성을 띠거나 강렬하게 묘사되면 ‘악녀’ 역할을 맡기 십상이었지만, 장만월은 주인공답게 카리스마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도깨비와 호텔 델루나 사이엔 그간 달라진 한국 사회의 젠더 인식이 담겼다는 평가도 있었다.
◇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
7월 말 끝난 tvN 수목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 ‘또한 성 역할 반전으로 신선하다는 평을 받은 바 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세 명의 여자 주인공 ‘배타미’(임수정), ‘차현’(이다희), ‘송가경’(전혜진)은 모두 성공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 찬 캐릭터로, 포털 사이트 회사를 이끌어가는 임원진이다. 사회적 능력을 갖춘 이들에게 잘 보이고자 외모를 가꾸고 더 매달리는 쪽은 남성들이었다. 만화 캐릭터 캔디나 신데렐라처럼 어렵고 팍팍하게 살다가 멋진 남자 주인공을 만나 인생 역전하는 스토리와는 정반대인 것이다.
◇ 걸캅스
드라마뿐만 아니라 영화에서도 변화하는 여성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뜨거운 이슈였던 영화 중 하나가 ‘걸캅스’다. 배우 라미란, 이성경씨가 주연을 맡은 영화 걸캅스는 형사물이지만 성 역할을 바꾸는 ‘젠더 스와프’ 형식을 보여줘 관객의 눈길을 끌었다. 내용 또한 여성 대상 디지털 성범죄 사건을 다루고 있어 여성 관객층의 지지를 한몸에 받았다. 관객이 영화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기 위해 직접 영화를 관람하러 가지 못할 경우 표를 예매를 해서 영화를 응원하는 캠페인인 ‘영혼 보내기’를 유행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변화는 영화계에서 도드라진다.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2018 한국영화산업 결산’ 자료에 따르면 2014년 전체 상업영화 중 여성 주연 작품은 20.9%에 그쳤지만, 2018년 31.2%까지 확대됐다. 여성 감독 영화 수도 꾸준히 증가했다. 2014년 여성 감독 영화는 ‘도희야’, ‘제보자’, ‘카트’ 등 단 3편에 불과했지만, 2018년 ‘탐정 : 리턴즈’, ‘미쓰백’, ‘리틀 포레스트’ 등 10편까지 늘어났다.
2030 중에서도 특히 여성들이 이런 진화를 반기는 분위기다. 평소 여성 중심 드라마를 많이 찾아 본다는 회사원 김보경(25)씨는 “지금까지 미디어에선 ‘사회적 성공에 대한 욕심은 남성 몫이고, 여성은 사랑에만 목맨다’는 구시대적 설정을 다뤄왔는데 여성도 당당하고 능력 있는 존재로 비춰지는 것 같다”라고 전했다.
김영옥 숙명여대 교수(여성학)는 “여성 서사를 중심으로 다루는 미디어는 앞으로 더 많아질 것이고, 많아져야만 한다”며 “여성들이 토론을 통해 여성 서사에 관한 사회적 담론을 더 많이 형성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유정 인턴기자 digita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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