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고신으로 1인 6역 “목소리톤 뒤죽박죽 고생도”… ‘웰컴2라이프’ 등 신스틸러
배드민턴 코치 출신으로 늑대대장 등 무대선 파격… “틀에 갇히지 않으려 의심 또 의심”
“그 영혼은 곱게 저승으로 갈 수 없어”. 낮게 깔린 신의 목소리엔 증오가 가득했다. 살기가 어린 곳에서 백합 한 다발이 담긴 바구니를 왼팔에 든 또 다른 신은 따뜻한 말로 분위기를 바꾼다.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지고, 생과 사의 시간은 다시 흐르게 될 것이야.” 화제 속에 1일 종방한 tvN 드라마 ‘호텔 델루나’에서 마고신(서이숙)은 매번 ‘다른 얼굴’로 장만월(아이유)을 찾아와 존재를 흔들어 놓았다. 마고신은 사람과 귀신의 생사를 관장하는 역이다.
서이숙(52)은 ‘호텔 델루나’에서 신스틸러였다. 혼자서 여섯 역할을 번갈아 연기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걸신 등 회마다 다른 캐릭터로 등장해 희극과 비극을 이끌었다. ‘신은 여러 모습으로 인간에게 다가온다’는 것을 보여 준, 상징적 역할이었다.
값진 도전이었지만, 배우는 애를 먹었다고 한다. “목소리 톤을 역마다 다르게 하려고 고민 많이 했어요. 촬영 분량이 늘고, 그 과정에서 여러 역을 번갈아 하다 보니 목소리 톤이 뒤죽박죽이 돼 고생 좀 했죠, 하하하.”
4일 서울 은평구 진관동의 한 카페. ‘호텔 델루나’ 종방 후 한국일보와 만난 서이숙은 인터뷰 도중 대사 얘기가 나오자 A4 용지 뭉치를 꺼냈다. ‘꽃이 지면 다시 피어남을 꿈꾸듯이 다시 살고 다시 만나고 다시 사랑해 주거라. 그것이 오만하고 어리석은 자기 연민에 빠진 아름다운 너희가 선택한 답이길’이란 마지막 회에서 그가 한 내레이션이 적혀 있었다.
“아름다운 너희란 말이 너무 와닿았어요. 인간애가 담겼으니까요. 마고신은 강요하지 않았어요. 힘든 삶이라고 하더라도 스스로 선택하게 하고 그 과정을 통해 존재의 가치를 깨닫게 하는 과정, 시청자에게도 울림을 주지 않았을까요?”
서이숙은 방송 중인 MBC 드라마 ‘웰컴2라이프’에서는 홍우식품 회장의 부인 신정혜 역을 맡아 ‘갑질’의 끝을 보여준다. 눈을 부릅뜨고 악을 쓰는 모습은 어느 재벌가 인물이 공개된 영상 속에서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것과 똑 닮았다.
서이숙은 2010년 드라마 ‘제중원’을 시작으로 ‘기황후’ ‘네 이웃의 아내’ 등에서 비중 있는 조연을 맡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방송가에선 ‘늦깎이 조연 배우’로 통하지만, 공연가에선 유명 인사다. ‘연극 명가’인 극단 미추에서 활동했다. 2003년 ‘허삼관 매혈기’에서 주인공 허옥란 역을 맡아 동아연극상 등에서 연기상을 탄 ‘대학로 연기파 배우’다.
드라마에서처럼 그의 연극 무대는 파격의 연속이었다. 서이숙은 ‘정글 이야기’에서 남성 배우도 포기한 늑대대장 역을, ‘열하일기 만보’에서 말로 환생한 연암 박지원을 연기했다. 성별은 물론 동물 역도 가리지 않았다. 서이숙은 “줄리엣같이 예쁜 여주인공 역할은 들어오지 않더라”고 웃으며 “틀을 깨 경계를 넘나들려 노력했고 틀에 갇히지 않으려 꾸준히 의심하며 연기했다”고 말했다.
서이숙은 20여년 동안 전국을 누비며 ‘마당놀이’를 꾸리기도 했다. “윤문식, 김성녀 선생님과 공연하며 정말 미친 듯 노래하고 연기했어요. 그때 목소리가 트였죠. 무대 앞에서 늘 관객을 만나다 보니 어느 무대든 두렵지 않더라고요. 물론 공연하며 고생 정말 많이 했죠. 연극에 제 젊은 영혼을 다 바쳤고요. 고생 끝에 지금의 발성을 얻었죠. 세상에 공짜는 없잖아요.” 힘 있는 목소리와 확 트인 발성, TV에서 그의 존재감을 보여준 ‘무기’를 얻게 된 배경이다.
소문난 배우가 되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새벽 이슬을 맞으며 경기 연천에서 열차를 타고 서울 대학로까지 출근했던 시절도 있다. 1989년 미추에 입단했을 때다.
서이숙은 대기만성형이다. 학창시절 배드민턴 선수였다. 고교 졸업 후 수원시 농촌진흥청 배드민턴 코치로 일하다 뒤늦게 배우로 전향했다. ‘허삼관 매혈기’에서 첫 주연을 맡기까지 15년여를 이름 없는 단역 혹은 조연으로 버텼다. 서이숙은 “북한산을 오르며 그때 마음에 쌓인 쓰레기를 치웠다”며 “등산으로 인격 수양을 했다”고 말했다.
‘고곤의 선물’과 ‘오이디푸스’ 등에 출연하며 선 굵은 배우로 성장했지만, 시련이 닥쳤다. 서이숙은 2011년 갑상선암을 진단받고 수술했다. 목을 써야 하는 배우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서이숙은 ‘이 또한 지나가리’ ‘아무것도 아니다’란 말을 되새기며 고통을 견뎠다. 직접 만난 그는 쉬 끓지 않고 단단한 ‘뚝배기’ 같았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2014년 이후 죽음에 관한 생각이 많아졌어요. 죽음이 우리 주변의 일이고 느닷없이 닥친다는 충격이었죠. 이 순간에 충실해야겠다 싶으면서도 생의 원한에 대해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던 차에 ‘호텔 델루나’가 들어왔고, 사후 위안을 다룬 작품이라 각별했던 것 같아요.”
이력처럼 어디로 튈지 종잡을 수 없어 보이는 중년 배우는 ‘아미(방탄소년단 팬)’다. 서이숙은 “방탄소년단을 좋아한다는 어느 60대 얘기를 듣고 관심을 두게 됐다”며 “방탄소년단은 평범함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친구들”이라고 말했다. ‘아이돌 덕질’에 빠진 서이숙은 내년 1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다. 한태숙 연출가의 새 창작극을 통해서다.
“드라마는 당분간 특별 출연으로 나올 것 같아요. 어떤 배우로 각인됐으면 싶으냐고요? ‘어른 같은 사람’으로 남고 싶어요. 연기와 삶에서 모두.”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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