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2019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4강 진출 전무…1996년 창설 이후 처음
국내 1,2위인 신진서 9단 및 박정환 9단의 잇단 패배…중국 보다 한 수 아래 입증
중국과 격차 벌어지면서 바둑 인기 ‘시들’…후원사 난색 표명, 국내 기업 주최 기전 위축
국내 차세대 주자인 ‘미생’은 윤곽도 희미, 암울한 미래에 등 돌리는 팬들도 늘어
이쯤되면 ‘참사’다. 안방에서 장만한 세계 무대를 고스란히 남의 잔치로 헌납했다. 우승컵은 고사하고 4강 진출조차 실패했다. 국내 ‘원·투 펀치’가 참전한 상황에서 가져온 결과였기에 충격파는 더했다. 팬들은 냉소적이다. 객관적인 전력이나 홈 그라운드의 이점 등을 감안하면 어떤 이유로도 이번 대회 성적은 납득하기 어렵단 평가에서다. 중국의 우승과 준우승으로 마무리된 ‘2019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우승상금 3억원) 대회를 바라본 바둑계 안팎의 총평이다.
7일 한국기원에 따르면 대전 덕명동 삼성화재 유성캠퍼스에서 열린 ‘2019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는 중국의 탕웨이싱(26) 9단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준우승은 양딩신(21) 9단에게 돌아갔다.
중국의 독무대로 정리된 이번 대회의 8강전까지만 해도 한국팀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8명 가운데 5명을 진출시킨 중국이 3명에 머물렀던 한국에 비해 수적인 우세를 보였지만 오히려 선수 ‘이름값’에서의 승산은 충분했다. 한국기원에선 이번 대회 8강전에 선착한 신진서(19·국내 1위, 8월 기준) 9단과 박정환(26·2위) 9단, 신민준(20·4위) 9단 등을 두고 ‘드림팀’ 진출이란 제목의 희망 섞인 보도자료까지 배포했다. 중국 간판스타이자, 실질적인 세계 랭킹 1위인 중국의 커제(22) 9단이 낙마한 상황에서 다분히 애국적인 전망으로 보였다.
신진서 9단 및 박정환 9단, 유리했던 바둑 그르쳐…집중력 등 정신력 문제 드러내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일단 경기 내용적인 측면에서 실망감이 컸다. 특히 국내 랭킹 1,2위인 신진서 9단과 박정환 9단이 모두 다 잡았던 경기를 놓쳤다는 부분은 반드시 짚고 넘어갈 대목이다. 두 선수의 성적은 사실상 현재 한국 바둑의 바로미터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여파 또한 상당하다. 무엇보다 최전성기에 들어선 두 기사가 상대한 중국 선수들의 면면을 살펴볼 때 아쉬움은 짙다. 실제 신진서 9단이 패한 랴오위안허(19) 8단이나 박정환 9단에게 항서를 받아간 탕웨이싱 9단의 경우엔 현재 초일류급으로 보기엔 무리란 게 중론이었다. 이제 막 세계 바둑계에 명함을 내밀기 시작한 랴오위안허 8단이나 자국내 랭킹 30위권대인 탕웨이싱 9단은 신진서 9단과 박정환 9단에 비해 무게감은 떨어졌던 게 사실. 더구나 대국 컨디션 조정 등이 유리한 홈 그라운드의 이점까지 감안한다면 신진서 9단과 박정환 9단의 패배는 냉정하게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신진서 9단의 경우엔 한 때 인공지능(AI) 승률이 90% 이상으로 나올 만큼, 유리한 국면으로 이끌었지만 결국 마지막 연속된 실수로 대세를 그르치면서 랴오위안허 8단에게 허무하게 패했다. 바둑TV 해설위원 겸 국가대표 감독인 목진석(39) 9단은 “신진서 9단이나 박정환 9단 모두 세계대회 성적에 대한 부담감을 크게 느끼고 있는 것 같고 이것이 바둑 내용에도 표출된 것 같다”면서도 “전반적으로 승부처에서의 집중력 부족이 이번 대회 패인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바둑도 ‘멘탈 스포츠’로 분류된단 점을 감안하면 한국 바둑의 경쟁력이 중국에 비해 정신력에서 뒤처지면서 한 수 아래란 사실이 공개적으로 입증된 셈이다.
가뜩이나 침체기 속 바둑 흥행에 ‘찬물’…국내대회 후원도 ’빨간불’
바둑 흥행에 찬물을 끼얹었다는 부문 또한 내상이다. 국내 랭킹 1,2위인 선수들의 부진은 가뜩이나 침체기에 들어선 바둑계엔 악재로 작용할 수 밖에 없다. 올해 중국 선수들끼리 결승전을 벌인 ‘삼성화재배 마스터스’ 대회는 바둑전문채널에서만 생중계됐다. 중국의 커제 9단과 한국의 안국현(27) 8단의 ‘2018 삼성화재배 마스터스’ 대회 결승전이 공중파와 더불어 포털 사이트까지 생방송되면서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던 지난해 상황과는 대조적이었다. 성적 부진 탓에 바둑 대중화의 기회마저 스스로 날려버린 꼴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후원사들도 국내·외 기전 유치에 난색을 표하는 실정이다. 실제 1997년부터 개최 중인 ‘LG배 조선일보 기왕전’(우승상금 3억원)의 경우 주최측에선 “명색이 한국 기업이 후원하는 세계대회인 데, 우리나라 선수가 아닌 중국 프로바둑 기사들이 우승컵을 계속해서 차지하다 보니 대회 개최의 의미가 퇴색된다”며 세계대회가 아닌 국내 기전으로 축소할 뜻을 내비쳤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LG배 조선일보 기왕전은 2016년 한국의 강동윤(30) 9단이 우승을 차지한 이후, 2017년엔 당이페이(25) 9단, 2018년 셰얼하오(21) 9단, 2019년 양딩신 9단 등의 중국 선수들이 연거푸 우승 트로피를 중국으로 배송했다. 심지어 이 기간 동안 한국 선수가 결승전에 올라간 사례는 전무했다. 6일 끝난 ‘2019 삼성화재배 마스터스’ 대회에서 또한 예외는 아니다. 올해 ‘삼성화재배 마스터스’는 1996년 창설된 이후, 처음으로 한국 선수의 4강전 진출 실패란 불명예스런 대회로 기록됐다. 최근 삼성그룹내에선 바둑을 포함한 모든 스포츠 후원에 회의적인 의견이 다분한 것으로 알려졌다.
될 성 부른 ‘떡잎’도 안 보여…뾰족한 묘수 필요하지만 전문가도 해법 못 찾아
팬들의 반응 역시 싸늘하다. 당장, 주요 세계 무대에서 우리나라 성적이 기대 이하다. 현재 주요 세계대회 가운데 한국 선수가 보유중인 타이틀은 2개 뿐이다. 지난해 ‘2018 몽백합배 세계바둑오픈대회’(우승상금 약 3억원)에서 우승한 박정환(26) 9단이 올해 6월 열렸던 ‘제12회 춘란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약 1억8,000만원·격년 개최)에 타이틀을 가져간 게 전부다. 이외의 ‘2019 백령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약 1억7,000만원)와 ‘2017 신아오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약 3억7,000만원·격년 개최)는 커제(22) 9단이, ‘2018년 천부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약 3억3,000만원)는 천야오예(30) 9단이, ‘2018 LG배 조선일보 기왕전’(3억원)은 양딩신(21) 9단이, ‘2016 응씨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약 4억6,000만원·4년마다 개최) 및 ‘2019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3억원)는 탕웨이싱(26) 9단 소유로, 모두 중국 선수들이 쓸어간 상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올해 4강 진출에 실패한 올해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인터넷 기사 댓글엔 “이럴 바엔 대회 자체를 폐지하자”에서부터 “중국기사들만 좋은 일 시켜주고 있다”는 등의 조롱 섞인 내용이 적지 않다.
더 큰 문제는 불투명한 미래다. 차세대 주자 포착은 가늠조차 어렵다. ‘사막에서 바늘 찾기’다. 한국기원에 따르면 8월 국내 랭킹에서 신진서(1위) 9단 보다 어린 100위권내 선수는 박상진(19) 4단이 유일하다. 아쉽게도 아직까지 각종 국내외 기전에서 박상진 4단의 존재감이 미미하다. 차세대는 물론이고 ‘차차차세대’ 주자들까지 즐비한 중국 바둑계와는 하늘과 땅 차이란 얘기다. 바둑TV 해설위원 겸 국가대표 코치인 홍민표(35) 9단은 “이번 대회를 통해 중국의 선수층이 얼마나 두터운 지 다시 한번 확실하게 경험했다”며 “대표팀 코칭스태프에서 항상 영재 발굴과 육성에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있지만 솔직히 말해 해답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고 토로했다. 자성의 목소리도 나왔다. 목진석 감독은 “(세계대회에서의) 성적 하락과 더불어 인기도 떨어지면서 국내 기전도 축소되고 있는 것 같다”며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전반적인 바둑계 저변 자체가 축소되고 있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허재경 기자 rick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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