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학자가 본 식민지근대화론’
도리우미 유타카 연구위원 출간
“‘반일종족주의’ 저자분들에게 오히려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건 아닌 것 같다’고 빨리 말해 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게 후회가 됐어요.”
최근 ‘일본학자가 본 식민지근대화론’을 펴낸 도리우미 유타카(鳥海豊ㆍ57) 한국역사연구원 상임연구위원은 6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반일종족주의’를 읽어 봤냐는 질문에 대답 대신 먼저 사과를 했다. 이영훈 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가 대표 저자인 ‘반일종족주의’는 일제강점기에 수탈과 착취는 없었고, 외려 발전과 근대화의 토대를 닦았다는 식민지근대화론에 기반하고 있다. 도리우미 연구위원은 식민지근대화론의 한계를 낱낱이 파헤쳐 온 연구자다. 일본 와세다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같은 대학 아시아 태평양 연구과에서 석사 과정을 밟은 이후 2013년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일제하 일본인 청부업자의 활동과 이윤 창출’이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책은 이 논문을 보완하고 수정해 6년 만에 출간한 것이다.
1928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만든 우편저금액 통계에 따르면, 당시 일본인 47만여명의 우편저금액은 2,648만엔에 달하는 반면, 조선인 1,866만여명의 우편저금액은 430만엔에 불과했다. 일본인 1명당 조선인보다 245배 많은 자산을 소유하고 있었던 셈이다. “일본인들은 조선에 오면 부자가 됐어요. 반면 조선인들은 부자였던 사람들조차 가난해졌죠. 일본은 돈을 쏟아 붓고 투자를 한다는데 왜 조선은 여전히 가난했던 걸까라는 의문에서 연구가 시작됐습니다.”
경제 구조상 조선은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이 의도적으로 조선의 공업 발전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때, 정부 주도의 공업을 육성해 민간에 넘기는 방식으로 국가 산업 기반을 닦아 갔다. 하지만 조선에선 같은 발전 경로를 밟지 않았다. 조선의 인건비가 더 싼 상황에서 조선의 공업을 일으킬 경우 일본 공업에 타격을 줄 것을 우려한 탓이다.
결국 3·1운동 직후 일제가 조선의 경제를 발전하겠다고 내놓은 정책은 ‘철도부설과 산미증식계획’이었다. 도로나 철도 건설, 항만 정비, 수리조합사업 등 인프라 정비에만 투자를 집중하고, 쌀 생산을 통한 ‘모노컬처(단일작물 농업)’ 경제를 강제했다. 그 결과 쌀값이 떨어지면서 조선 경제는 무너져 내릴 수 밖에 없었다. 도리우미 연구원은 “일본은 조선 경제가 발전해야 할 시기에 발전하지 못하도록 막았다”고 진단했다.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은 그럼에도 일본이 재정적 투자를 하지 않았냐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불편한 진실이 있다. 일본이 투입한 돈은 대부분 일본인 토목청부업자들이 장악했다. 조선인 청부업자는 구조적으로 배제됐다. 일본인 토목청부업자들은 조선인들의 임금을 떼먹거나 매우 조금만 줬다. ‘조선총독부 통계연보’ 등의 공식 자료들에선 당시 조선인 막일꾼의 하루 임금을 80전~1엔가량으로 계산했다. 그러나 도리우미 연구원은 각종 자료를 토대로 실제론 30~40전 수준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표면적으로는 공사금액의 평균 57%를 노무비로 책정해 놓고, 실제론 17% 정도만 주고 나머지를 ‘부당 이득’으로 챙기는 꼼수를 편 것이다.
그는 “한국 학계에서는 식민지근대화론을 거의 상대해 주지 않았고, 그로 인해 식민지근대화론이 성장하고 강해진 측면이 있다”며 “이번 책을 계기로 활발하게 토론이나 연구가 이뤄지는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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