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꽃뱀 프레임, 피해자다움 요구”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여비서 성폭행 혐의로 실형을 확정받자 여성계는 일제히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직장 내 상하관계를 이용한 각종 성범죄를 근절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희정성폭력사건공동대책위원회는 9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일터에서의 성희롱ㆍ성폭력을 끝장낼 수 있는, 우리 사회의 변곡점이 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서울여성노동자회에 따르면 지난해 접수된 직장 내 성희롱ㆍ성폭력 상담은 819건으로, 그 가운데 78%는 사장과 상사가 직장 내 우월한 지위를 이용한 것이었다. 또 피해자 중 53%는 해고, 부당인사, 직무 미배치, 집단적 따돌림 등 불이익을 경험했고, 32%는 “피해가 발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2016년 접수된 직장 내 성희롱ㆍ성폭행 사건의 경우 피해자들의 72%가 현시점에서 회사를 떠난 상태인 것으로 조사됐다.
손영주 서울여성노동자회 회장은 “피해자들 입장에서 가해자는 일상적으로 자신에게 업무지시를 내리고, 업무를 평가하며, 심지어 해고까지 결정할 수 있는 업무상 위력을 가진 당사자임을 잘 알기에 가해가 이어져도 참고 견딜 수밖에 없다”며 “더 이상 우리사회가 타인에 고통에 무뎌지지 않기를, 그래서 더 이상 피눈물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제2의 김지은’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여성계는 또 직장은 물론, 일상에까지 보편화된 권력 관계가 성범죄로 이어지지 않도록 사회적 감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피해자 김지은씨 변호를 맡았던 정혜선 변호사는 “안희정 사건은 성폭행에서의 ‘위력’이 노골적인 갑질이나 폭력적인 행태를 띄지 않고도, 점잖게 공기처럼 작동하는 방식으로 피해자의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어떻게 방해하고 왜곡할 수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줬다”고 주장했다. 김경숙 용인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이번 판결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아직까지 사건 발생을 두고 피해자 탓을 하고 ‘꽃뱀’ 프레임을 씌우며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의 정체성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며 “가해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성범죄에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동순 기자 doso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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