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열의 음악앨범’ ‘캠핑클럽’ 반향… ‘탑골공원’ 된 대중문화
“과거와 현재 돌아보게 해” 전성기 지난 스타가 각광
“휴대폰 데이터 100기가 써” 1990년대 음악 방송 실시간 스트리밍이 유튜브 ‘성지’로
복고에 열광하는 아이돌, 음악 작업도 변화
“방송, 사랑 그리고 비행기.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이 뭔지 아세요? 출발할 때 에너지가 가장 많이 든다는 겁니다.” 미수(김고은)와 현우(정해인)가 처음 만났을 때 빵집 라디오에선 마침 KBS FM ‘유열의 음악앨범’ 첫 방송이 흐르고 있었다. 1994년 10월 1일이다. 유열의 사려 깊은 목소리는 얼어붙은 분위기를 녹였고, 그늘졌던 현우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라디오는 어색했던 두 청춘을 잇는 연결고리였다. 지난달 개봉한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풍경이다. “진짜 제 라디오 첫 방송 오프닝 멘트예요. 그 멘트를 썼던 송정연 작가에게 연락해 자료를 찾았고요.” 가수 유열이 한국일보와의 전화 통화에서 들려준 영화 제작 뒷얘기다.
◇ “라디오로 사람 많이 찾았죠” DJ 유열이 간직한 엽서
“두부야, (이)메일 비밀번호는 내 학번이야”. 미수와 현우는 라디오 방송에 서로만 알 수 있는 별칭으로 사연을 보내 끊어질 듯한 인연을 잇는다.
라디오 방송은 우연을 때론 필연으로 만들었다. 전화가 엇갈리면 만나기 어려웠던, 쉽고 빠르게 인연을 쌓을 수 없기에 가능했던 마법이었다. “그땐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 행방을 찾고 마음을 전하는 청취자들이 많았어요. 안타까운 마음에 그때 받은 엽서를 아직도 갖고 있고요. 골목길, 계단, 옥탑방, 작은 빵집, 전화 박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서로 돌아가고, 더딘 시간을 통해 사람과 사랑이 빛나잖아요. 그래서 관객들이 찾는 게 아닐까요?”
유열은 이 영화를 다섯 번 봤다고 했다. 전화 통화가 끝난 뒤 그는 ‘비 오는 날 빵집에서 문 열고 미수와 현우가 의자에 앉아 밖을 바라보는 풍경이 기억에 남더라’는 문자를 보냈다. 영화에서 이끼 낀 골목길에 추적추적 내린 비가 품은 흙냄새가 코끝에서 맴도는 듯했다.
이야기 전개가 목에 고구마 걸린 듯 답답하다는 평도 있지만, 이 영화엔 지난 6일까지 100만 관객이 몰렸다. 1990년대 라디오 DJ였던 유열을 발판 삼아 아련하고 짠한 옛 정서를 스크린에 복원한 결과다. 유열은 2005년까지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며 받은 엽서 등을 영화사 PD와 공유하며 제작에 도움을 줬다고 한다.
◇”참 수동적” 핑클 고백의 반향
추억의 스타가 요즘 대중문화의 화두다. 1990년대 큰 인기를 누리다 2002년 활동을 끝낸 1세대 아이돌 그룹 핑클은 캠핑카(JTBC ‘캠핑클럽’)를 타고 각지를 떠돌고, 1970~90년대 빛을 봤던 배우 강문영과 가수 김완선 등은 함께 여행(SBS ‘불타는 청춘’)을 떠나 시청자의 눈길을 끌고 있다. 유행에 민감한 방송가에서는 전성기가 지난 스타가 되레 주목받는다. 짧게는 데뷔 20년이 지난 연예인을 내세운 프로그램도 잇따라 제작되고 있다. 복고 열풍이 소재에서 사람으로 확장되면서 생긴 변화다.
복고의 열기가 사람으로 옮겨붙으면서 콘텐츠의 여운은 짙어졌다. ‘캠핑클럽’에서 핑클은 “참 수동적”이라며 옛 히트곡 ‘루비’(1998)의 가사를 몸서리치며 부끄러워한다. 순종적 여성을 노골적으로 노래한 과거에 대한 쑥스러움이었다. 바람피운 남자친구를 향해 ‘난 여전히 너의 여자’라고 고백하고, 남자친구와 바람피운 여자를 찾아가 ‘다신 만나지 말라고 부탁’했다는 가사는 지금은 분명 환영받지 못할 내용이다.
옛 스타들의 소환은 ‘그땐 그랬지’라는 아련한 일회성 기쁨을 주는 것을 넘어 그들을 통해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게 한다. 추억의 스타가 새로운 콘텐츠로 각광받는 이유다. 1990년대 ‘요정’들의 입에선 남편과의 잠자리에 대한 얘기까지 나온다. 늘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스타들이 나이를 먹고 ‘보통 사람’이 돼 대중과 비슷한 삶을 살아가고 그 모습에 시청자들은 위로를 받고 동질감을 느낀다. ‘캠핑클럽’을 기획한 마건영 PD는 “추억의 스타를 통해 시청자들은 나의 철없던 10대 혹은 20대를 떠올리고, 과거의 복기를 통해 나를 반추할 수 있어 공감대를 형성한다”고 말했다.
20세기 스타들이 나오는 곳엔 사람들이 몰린다. 유튜브에선 채널 ‘SBS K팝 클래식’이 ‘핫’하다. 1998년부터 2000년대 초반 방송된 SBS 가요프로그램 ‘인기가요’를 온라인에서 실시간 스트리밍(재생)으로 보여 주는 곳이다. 나이 든 분들이 문화를 즐기는 장소란 의미에서 ‘온라인 탑골 공원’이란 별명이 붙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엔 ‘#온라인 탑골 공원’이 굴비 엮이듯 이어졌고, ‘SBS K팝 클래식’은 유튜브 전체 실시간 시청자 수 4위(8월 29일 기준)까지 치고 올라왔다.
30~40대는 추억을 즐기기 위해, 10~20대는 K팝의 뿌리를 찾기 위해 ‘온라인 탑골 공원’을 찾는다. 아이돌 그룹 업텐션 멤버인 선율(23)은 “‘온라인 탑골 공원’에 놀러 가 (휴대폰) 데이터 100기가를 다 썼다”고 말했다. ‘온라인 탑골 공원’이 화제가 되면서 10~20대는 ‘가나다라마바사’와 ‘리베카’를 부른 가수 양준일을 유물 발굴하듯 재발견해 ‘1990년대 지드래곤’이라 부르며 그의 음악을 재조명한다.
◇”장기적 흐름” 시티팝 유행 너머
추억의 스타가 환호받고 ‘온라인 탑골 공원’이 등장한 현실은 복고가 단발적 유행이 아닌 주류 문화적 흐름으로 생명력을 갖기 시작했다는 걸 보여 준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차갑고 빠른 디지털 세상에서 느끼는 피로감에 대한 반작용으로 젊은 세대가 복고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있다”며 “복고의 유행은 장기적으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요즘 TV엔 동네에서 닭싸움 등 추억의 놀이(tvN ‘찰떡궁합’)를 하고, 과거로 돌아가 문화, 경제 이슈 등을 되짚는(채널A ‘리와인드’) 프로그램이 쏟아지고 있다. TV에서 뿐만이 아니다. 음악 시장에는 1990년대생 가수가 1980~90년대풍의 노래를 불러 큰 인기를 얻고 있다. 1990년대풍 발라드곡 ‘솔직하게 말해서’로 지난 6월 둘째 주부터 1주일 넘게 멜론 등 주요 6개 차트 정상을 차지한 김나영(28), 앞서 4월 ‘우주선’을 발표한 정승환(23) 등이 대표적이다.
‘솔직하게 말해서’를 만든 한상원 작곡가는 “1990년대는 멜로디의 황금기였다”며 “옛 노래가 지닌 감성을 요즘 10~20대도 좋아해 서지원의 ‘내 눈물 모아’ 같은 분위기의 곡을 만들게 됐다”고 창작 계기를 들려줬다. 원더걸스 출신 유빈이 발표한 ‘숙녀’ 등 1980년대 한국과 일본에서 유행했던 시티팝이 Z세대(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초반 태어난 세대)에 뜨거운 호응(혜은이 ‘천국은 나의 것’ 들으며 춤추는 Z세대ㆍ6월 12일 자 14면)을 얻고 있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인디 음악인의 복고 코드 활용은 더욱 적극적이다. 가수 기린은 힙스터들 사이에서 이름난 ‘탑골 가수’다. 그는 1980~90년대 유행했던 뉴잭스윙(힙합풍의 댄스곡) 장르를 기반으로 앨범을 냈고, 신곡 ‘예이 예이 예이’ 뮤직비디오를 90년대 인기 프로그램 ‘TV는 사랑을 싣고’를 패러디해 찍었다.
◇진공관 마이크로 녹음까지
K팝을 선도하는 1990년대생 아이돌도 ‘탑골 공원 유행가’에 푹 빠졌다. 아이돌 그룹 B1A4 멤버인 산들(27)은 윤상의 ‘가려진 시간 사이로’(1992)를, 공원소녀 멤버인 서경(20)은 이상은의 ‘담다디’(1988)를 요즘 즐겨 듣는다고 한다. 서경은 “어머니가 자주 불러 알게 됐고 멜로디가 간단하고 가사가 재미있어 ‘담다디’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젊은 가수들이 복고에 빠지다 보니 창작 과정도 변하고 있다. 가수 백예린(22)은 지난 3월 낸 노래 ‘그건 아마 우리의 잘못은 아닐거야’ 등을 녹음할 때 진공관 마이크를 썼다. 마이크 안의 진공관을 예열해야 해 30여분의 준비 시간이 걸려 번거롭지만 따뜻한 소리를 얻기 위해 옛 재즈 가수들이 녹음할 때 주로 썼던 장비를 사용했다. 백예린의 앨범을 프로듀싱한 작곡가 구름은 “사소할 수 있지만 따뜻한 정서를 살리려 진공관 마이크를 썼다”며 “만들어진 음원 소스를 쓰지 않고 모두 직접 연주해 녹음했다”고 말했다. 가수 권진아, 정승환 등이 속한 안테나뮤직 관계자는 “빈티지 사운드를 내기 위해 드럼을 천으로 감싼 뒤 연주하기도 하고 해외에서 오래된 악기를 직구(직접 구입)하기도 한다”며 요즘 녹음 방식을 들려줬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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