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속세ㆍ증여세 없고 법인세 낮아… 한국인 이주ㆍ투자 문의 40% 급증
투자이민 문턱 높아 성사 어려워… “유령법인 등 편법 이주” 소문도
“2주 전에도 문의가 왔어요. 6월에는 실제 보러 온 분들도 꽤 있고요. 추석 이후에도 (방문 팀이) 예정돼 있습니다. 정보만 얻으려고 온 건 아니고, 실제 국내 자산을 정리하고 들어올 생각을 가진 분들이죠. 작년에 25건이던 문의가 올해만 40건 정도니 벌써 40%가량 늘었네요.”
익명을 요구한 싱가포르 부동산업계 관계자 얘기다. ‘적도의 기적’이라 불리는 싱가포르는 최근 한국의 금융부자들이 가장 살고 싶어하는 나라로 꼽힌다. 국내 경제가 어렵고 정치 상황이 어지러운 틈을 타 이민이 늘었다는 보도에 단골로 등장할 정도다. 자산리서치업체 뉴월드웰스와 아프라시아은행이 발표한 ‘부의 이동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금융부자들이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선호하는 곳이기도 하다. 싱가포르를 여러 차례 답사하고 실제 이주를 저울질하는 층은 주로 50대 자산가다. 업계 관계자는 “자산가는 보통 현금 자산 100억원 이상 보유자를 가리킨다”고 귀띔했다.
9~11일 현지를 둘러보고, 금융 및 부동산, 한인 사회 관계자들을 만났다. “어둠의 루트로 돈 세탁을 하거나 유령 법인 설립 등 편법을 통해 싱가포르에 입성한 부자들이 있다” “그들만의 세계가 따로 있어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설이 들렸다. 그러나 싱가포르 정부도, 한국 정부도 관련 통계를 내놓지 않으니, 정확한 사정을 가늠하긴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소문은 가고는 싶지만 오기가 쉽지 않은, 투자 이민 대상지로 관심은 뜨겁지만 진입 장벽이 높은 싱가포르의 인기를 보여주는 한 방증이기도 하다.
실제로 싱가포르는 살만한 이유가 많은 나라다. 비행기로 우리나라에서 6시간 거리로 다른 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깝고, 인종 차별도 없다. 교육 치안 복지 의료 금융 어느 것 하나 뒤지지 않는다. 돌아본 싱가포르 시내는 서울보다 깨끗하고 쾌적했다. 교통 정체도 눈에 띄지 않았다. 거기다가 동남아시아에선 거의 유일한 영어권 선진국이다. 중국어도 쓴다. 그래서 싱가포르 이민을 꿈꾸는 40대 자산가는 주로 자녀 교육에 초점을 맞춘다. 최근엔 치안 탓인지 홍콩에 살면서 금융 선박 분야에 종사하는 한국인들이 싱가포르 이주를 문의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세금 부담도 적다. 상속세와 증여세가 아예 없고, 법인세(17%)도 한국보다 낮다. 법인 설립도 쉽다. 현지 진출 법인 관계자는 “회사가 성장 가능성이 있다면 더 커지기 전에 싱가포르로 오는 게 절세 측면에서 남는 장사”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싱가포르로의 탈출을 꿈꾸는 우리 부자들이 현지 조사를 하면서 가장 공들여 묻고 캐는 내용이 세금 관련 정책 변화라는 게 현지 업계 관계자의 말이다.
더욱이 당장 거주할 아파트만 사도 투자 가치가 충분할 정도로 부동산 시장 전망도 밝다. 싱가포르 주거용 부동산(주택, 아파트)은 10년 전과 비교해 3배 올랐다. 현재 아파트 가격은 79㎡ 기준 8억~30억원이다. 현지 부동산업계 관계자는 “싱가포르 정부가 인구를 늘리는 정책을 추진 중이라 현재 추세로 본다면 세계적인 경제 침체가 없는 한 앞으로 3년 안에 더 오를 것”이라며 “내ㆍ외국인의 부동산 취득세 차이가 없다가 차차 외국인에게 더 물리는 방향으로 정책이 바뀌면서 가급적 빨리 오는 게 돈 버는 길이라는 분위기도 형성돼 있다”고 말했다. 561만명(2017년 기준)이 사는 나라에 한인이 약 3만명이다보니 웬만한 호텔과 몰엔 한국인 직원이 있을 정도다. 싱가포르는 국내 부자들의 구미를 당길만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실제 이민 실행은 다른 얘기다. 싱가포르는 투자 이민 문턱이 높은 축에 속한다. 싱가포르 정부가 제시하는 4가지 사업 분야에 투자해야 한다. 3년 이상 회사의 대표로서 회사 지분의 30% 이상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250만싱가포르달러(22억원)를 투자해야 하고, 연 매출이 5,000만싱가포르달러(431억원) 이상이어야 한다. 돈이 전부가 아니다. 관련 서류 제출 등 사업 능력도 검증 받아야 한다. 고용 기여 등 부대 조건도 따진다. 법인을 만들기 쉬운 반면에 자금 입출 관리는 엄격하다. 고객에게 자금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전적으로 금융회사 책임이라 계좌 개설도 쉽지 않다. 싱가포르 주재 한국 대사관 관계자는 “일각에선 돈의 꼬리표를 떼기 위한 자금 세탁 창구가 있다고 하지만 아마 예전 이야기일 것”이라며 “싱가포르 정부는 자금 세탁에 대해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매뉴얼에 따라 꼼꼼하게 감독한다, 자금 세탁을 하다 걸린 금융회사가 문을 닫기도 했다”고 말했다.
국내 이민업계 관계자는 “아무리 대기업 사장이라고 해도 본인이 고용된 사장이라면 조건 탈락”이라며 “싱가포르는 영어권 국가인 데다 선진국이어서 많은 분들이 희망하긴 하지만 조건이 하도 까다로워 실제 싱가포르 투자 이민에 성공하는 사례는 1년에 1, 2건에 그치는 걸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싱가포르 한인회 관계자는 “싱가포르 이민이 늘었다는 얘기는 주로 한국에서 흘러온다”라며 “최근엔 비자도 쉽게 내주지 않고 영주권 발급은 정말 힘들어졌다”고 했다.
현지 한인들은 막상 살아보면 불편한 점이 많다는 말을 한다. 물가가 비싸고 한국과 달리 일상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일도 종종 있다. 자동차 가격은 한국의 3배, 외식비는 2인 기준 5만~12만원이 든다. 월세는 방 3개 기준으로 350만~650만원이다. 은행 계좌 개설에만 30분 이상 기다려야 하고 서류를 하나 빠뜨리면 다시 방문해야 한다. 가전 수리 등 출장 서비스는 기본 대기 일수가 3~7일이다. 현지 부동산 업계 관계자는 “현지 답사를 하러 온 한국인 가운데 ‘생각보다 물가가 만만치 않다’고 토로하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싱가포르=고찬유 특파원 jutdae@hankookilbo.com
김동욱 기자 kdw1280@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