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한국 공포영화의 역사
※ 한국영화가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한국일보>는 영화만큼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를 통해 매주 토요일 들려드립니다.
이용민 감독의 ‘악의 꽃’(1961)은 한국 공포영화의 본격적인 시발점이었다. 식물학자 이광수(이예춘)는 20년 전 사랑했던 여인 백련(도금봉)의 혼이 깃든 흡혈식물 악의 꽃을 만들어낸다. 낮에는 평범한 화분의 꽃송이 같지만 밤에는 처녀귀신으로 변하는 이 꽃에 피를 대주기 위해 광수는 사람을 죽이고, 종국엔 자신이 흡혈귀가 되어 아내(주증녀)의 피를 노리게 된다. 사람의 피를 빠는 흡혈식물이라는 설정의 이 영화는 비록 로저 코먼 감독의 ‘흡혈식물 대소동’(1960)과 흡사한 아이디어였지만, 당시 한국 영화로선 참신한 시도로 다가왔다. ‘포화 속의 십자가’(1956)나 ‘자유결혼’(1958), ‘맹진사댁 경사’(1962) 등을 만들며 장르를 가리지 않았던 이 감독은 자신의 이름을 내건 이용민 프로덕션을 설립하고는 한국 최초의 공포영화 전문감독으로 나서게 된다.
한 많은 여인의 혼백이 복수를 마친 뒤에야 이승을 떠난다는 한국 고전공포 영화의 공식을 정립한 건 ‘살인마’(1965ㆍ김영한의 ‘목없는 여살인마’(1985)로 리메이크된다)에서였다. 시어머니와 육촌자매의 공모로 독살당한 옛 아내의 원혼이 고양이로 환생해 복수한다는 내용의 이 영화는 고딕풍의 서구 공포영화를 답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래설화의 토속적 색채를 가미해 한국 공포영화가 갈 길을 노정한 이정표가 되었다. 국도극장에 2주간 걸린 ‘살인마’는 흥행에 큰 재미를 보진 못했지만 다음 작품인 ‘목없는 미녀’(1966)가 서울 관객 10만명이라는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자 권철휘 감독의 ‘월하의 공동묘지’(1967), 임권택 감독의 3D 공포영화 ‘몽녀’(1968) 등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지며 한국 공포영화의 붐이 일어나게 된다. 공포영화에 대한 이용민 감독의 애착은 ‘프랑켄슈타인’(1931)의 한국적 번안화인 ‘공포의 이중인간’(1975)에까지 이어진다.
◇천편일률 틀 반복 속 정권 비판도
그러나 한국 공포영화의 르네상스는 1970년대에 들어서 급격히 사그라지고 만다. TV의 보급, 유신정권의 검열과 억압으로 한국 영화 산업 전반이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하얀 소복 입은 귀신 또는 공동묘지 등 같은 틀을 천편일률적으로 답습한 작품들이 난립하며 장르의 진화가 이뤄지지 않은 탓이기도 했다. 특히 납량특집 TV시리즈 ‘전설의 고향’(1977~1989)의 방영은 공포영화의 흥행에 치명타로 작용했고, 영화사와 흥행업자들 사이에선 공포영화에 투자하길 꺼리는 분위기가 만연하게 된다. 그러나 침체와 쇠락의 와중에도 공포영화는 ‘옥녀의 한’(1972), ‘꼬마 신랑의 한’(1973), ‘낭자한’(1974) 같은 일련의 한(恨) 시리즈 등으로 숨통을 트며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1980년대 들어서 새로운 감각으로 공포영화 장르의 중흥을 도모하는 일련의 흥미로운 시도들이 나타나게 된다.
박윤교 감독은 ‘백발의 처녀’(1967), ‘마녀성’(1968), ‘백골령의 마검’(1969)을 잇달아 성공시키며 이용민 감독의 뒤를 잇는 공포영화 전문감독이었다. 떠오르는 신인배우였던 윤미라를 기용해 화제를 끈 ‘옥녀의 한’이 흥행에 실패한 뒤, ‘낭화비권’(1978) 같은 액션 사극이나 무협영화의 거장 후진취안(호금전)과 손잡은 한홍 합작 ‘산중전기’(1979) 등으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던 그는 현대를 배경으로 한 공포물 ‘망령의 한’(1980)과 ‘망령의 웨딩드레스’(1981)를 내놓는다. 정세혁이 주연한 이 두 작품은 억울한 죽음을 맞은 여인의 복수라는 점에서 기성 공포영화의 연장선상에 있었지만, 사회비판적 메시지와 전형성을 벗어난 스토리텔링을 추구한 영화들이었다. ‘망령의 한’에서 태화는 아들이 귀한 집안의 5대 독자이다. 자식이 없던 그는 어머니의 권유로 절에 얹혀살던 고아 소녀 점례와 부부가 되고 마침내 점례가 아들을 임신한다. 그러나 검사 결과 점례의 몸 안에는 종양이 자라나 있었고, 시어머니는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산모의 죽음을 강요한다. 25년이 지나 장성한 태화의 아들은 신혼여행을 마치고 아내와 집안에 돌아오는데, 원한을 품은 점례의 혼백이 며느리에 빙의해 복수를 꾀한다. 종교를 통한 해원과 화해로 다소 맥없는 마무리를 맺지만 ‘망령의 한’은 남존여비 풍조가 만연한 가부장제 사회의 폭력적인 민낯을 공포 장르의 형식 안에서 섬뜩하게 내비친다.
‘망령의 한’에서 내비친 사회비판적 요소는 ‘망령의 웨딩드레스’에서 급진화된다. 기업의 사장으로 단란한 가정을 꾸리던 영하는 서울로 상경하던 가수지망생 정임(선우은숙)과 만나 내연의 관계가 된다. 그러나 영하는 심한 집착을 보이며 결혼식을 치르자고 조르던 정임을 우발적으로 살해하고 시신을 우물에 유기했다가 공동묘지에 파묻는다. 그 후 정임의 귀신이 출몰해 영하와 그의 가족을 괴롭히는데, 자신이 묻은 시체가 실은 마네킹이며 정임이 살아 있음을 영하가 깨달으면서 반전이 찾아온다. 사실 영하는 옛 사장을 배신해 기업을 강탈한 배신자였고, 정임은 영하에게 배신당한 뒤 자살한 옛 사장의 딸이었던 것이다.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영하는 정임과 그녀의 조력자를 죽이려다 도리어 자신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전두환의 제5공화국이 막 출범하던 시기, ‘망령의 웨딩드레스’는 B급 공포물의 외피를 쓴 채 독재자와 군사정권의 도덕성을 겨냥한 한 편의 메타포였다.
◇한국형 좀비의 등장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강범구의 ‘괴시’(1980)는 한국 영화 사상 최초의 좀비 영화였다. 당룡(김태정)을 캐스팅한 ‘사망탑’(1980)과 같은 해에 추진된 한홍 합작이었던 ‘괴시’는 해충을 박멸하기 위해 만든 초음파 수신기가 오작동한 탓에 시체들이 살아나 좀비가 되었다는 독특한 설정을 깔아둔 영화였다. 그러나 ‘한국 최초의 좀비 영화’라는 역사적 의의는 표절작임이 드러나면서 빛을 잃는다. 사실 ‘괴시’는 조르주 그라우 감독의 스페인 공포영화 ‘창문을 열지마’(1974)를 스토리와 대사, 카메라 앵글까지 따라 한 복제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1980년대 한국 공포 장르가 기존의 틀을 벗어나 다변화를 추구한 사례 중 하나로 언급할 수는 있을 것이다.
‘거지왕 김춘삼’(1975), ‘협객 시라소니’(1980)와 같은 액션영화를 장기로 삼았던 이혁수 감독이 사극 호러의 수작인 ‘여곡성’(1986)을 발표한 예처럼, 다양한 대중영화에서 관록을 쌓은 감독들이 공포영화에 새롭게 도전하면서 한국 공포영화의 1980년대는 보다 다채로운 양상을 띠게 된다. 특히 고영남 감독의 ‘깊은 밤 갑자기’(1981)는 한국 공포영화의 역사 전체를 통틀어 손꼽을 만한 걸작이다. 이 영화는 ‘잃어버린 태양’(1964), ‘소령 강재구’(1966), ‘김두한 3부-폭탄열차편’(1975), ‘꽃신’(1978)과 ‘소나기’(1978) 등 청춘 멜로와 문예영화, 협객물과 전쟁영화를 가리지 않고 장르 영화의 최전선에 섰던 연출작이 105편에 달하는 고영남의 필모그래피 중 유일한 공포영화다.
나비를 연구하는 곤충학자 강 박사(윤일봉)의 아내 선희(김영애)는 남편이 동료 학자들을 불러모아 슬라이드 사진을 돌려 보던 중 정체불명의 목각인형 사진이 끼어 있는 걸 보고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다시 곤충 채집을 떠났다 돌아온 남편은 집을 잃고 고아가 된 19세 처녀 미옥(이기선)을 가정부로 들이는데, 선희는 미옥이 들고 온 짐 속에서 사진 속 목각인형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는다. 남편과 미옥이 불륜 관계일지 모른다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선희는 사고로 위장해 미옥을 살해하고 인형을 내다버리지만, 살아 있기라도 한 듯 매번 돌아오는 목각인형과 미옥의 망령에 시달리며 미쳐 버리게 된다. ‘빙점 81’(1981)이 김수용 감독의 동명 영화를 리메이크한 것처럼 ‘깊은 밤 갑자기’의 이야기는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를 변주한다. 여름 시즌에 개봉한 영화는 서울 관객 2만8,178명의 초라한 성적에 그쳤다. 그러나 아내의 왜곡된 심리를 드러내는 독특한 만화경 촬영, 시종일관 기괴한 무드와 긴장감을 유지하다가 망령과의 대결에서 억눌린 에너지를 폭발시키는 완급은 ‘깊은 밤 갑자기’를 오늘날 서구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 컬트 걸작의 반열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장르의 부활을 꿈꾸었던 1980년대 한국 공포영화의 다양한 실험들은 더 이상의 명맥을 이어 가지 못하고 단절되고 만다. 김성홍 감독의 ‘손톱’(1994)과 ‘올가미’(1997)가 있었지만 장르 전체의 생명력을 논하기엔 미미한 수준이었고, 공포영화의 시장성은 열악했으며, 한국형 공포물의 과거는 잊힌 역사가 되었다. 단절되고 지워진 한국 공포영화의 계보가 다시 시작되기 위해서는 박기형 감독의 ‘여고괴담’(1998)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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