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도어 루즈벨트 딸 앨리스 루즈벨트 접대 음식 재현
“우리는 황실 문양으로 장식한 조선(대한제국) 접시에 담긴 조선 음식을 먹었다. 내가 사용한 물건을 내게 선물했고, 작별 인사에서 황제와 황태자는 자신의 사진을 내게 줬다.”
시어도어 루즈벨트(1858~1919) 미국 대통령의 딸 앨리스(1884~1980)가 1934년 펴낸 자서전 ‘혼잡의 시간들’ 속 이야기다. 1900년대 초 루즈벨트 대통령은 아시아 각국으로 사절단을 보내 외교를 지휘하곤 했는데, 앨리스는 1905년 9월 20일 고종의 초청으로 관료 18명을 이끌고 대한제국을 찾았다. 고종은 앨리스의 내한을 굉장히 중요한 기회로 여겼다. 일본의 위협에 위태로워진 대한제국을 미국이 보살펴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고종의 대접은 극진했다. 앨리스를 국빈으로 대우하며 거리 곳곳에 성조기를 내걸었고 자신이 타던 황실가마까지 내줬다.
고종은 앨리스와 오찬도 함께했다. ‘공식적으로 황제가 외국 여성과 처음 식사한 자리’(미국 뉴욕 공공도서관 소장 당시 오찬 메뉴판 기록)였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외국인이 참석하는 연회엔 서양식 코스요리(주로 프랑스식)가 제공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날엔 특별히 한식이 대접됐다고 한다. 문화재청과 신세계조선호텔은 서울 종로구 덕수궁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에서 열리는 ‘대한제국 황제의 식탁’ 특별전을 위해 당시 오찬 요리를 20일 재현했다. 뉴욕 공공도서관이 소장한 오찬 메뉴판부터 고종 재위 시기 간행한 의궤와 요리책을 참고해 고증했다.
고증에 따르면 덕수궁 중명전에서 열린 당시 오찬에는 식사부터 다과, 과일 등 17가지 요리와 3가지 장이 준비됐다. 신선로에 육고기, 해산물, 채소 등을 색 맞춰 배열해 끓인 국물음식 열구자탕(신선로)과 국수에 완자, 고기채, 알쌈(계란 지단에 양념 고기를 넣고 빚은 음식)을 넣고 비빈 골동면 등이 대표적이다. 대부분 1902년 고종이 51세 되는 해를 기념한 임인진연이나 고종, 순종의 생일상에 올랐던 음식들이다. 그만큼 정성이 한껏 들어간 식단이었다.
융숭한 대접과는 달리 앨리스는 무례한 태도로 일관했다. 당시 대한제국 황실의 외빈 접대를 담당했던 엠마 크뢰벨은 저서 ‘나는 어떻게 조선 황실에 오게 되었나’(1909)를 통해 앨리스의 행동을 이렇게 묘사했다. “(고종 알현 당시) 그녀는 승마복을 입고 있었고 승마용 채찍을 한 손에 들고 입에는 시가를 물었다. (명성황후릉인 홍릉에 방문해서는) 동물 석상에 관심을 가졌는데, 특히 말 석상을 보고서는 말에서 내려 재빨리 석마(石馬) 위에 올라탔다. 그토록 신성한 곳에서 그토록 무례한 짓을 저지른 것은 한국 외교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앨리스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고종의 외교 노력 역시 별 소용이 없었다. 앨리스가 내한하기 전인 1905년 7월, 미국의 육군장성 윌리엄 테프트(1857~1930ㆍ루즈벨트 후임 대통령)가 이미 일본 수상 가쓰라 타로(桂太郞ㆍ1848~1913)와 ‘가쓰라-테프트’ 밀약을 맺었던 탓이다. 미국과 일본이 각각 미국의 필리핀 지배,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인정한다는 내용이다.
‘대한제국 황제의 식탁’ 전시에는 이 같은 애처로운 비화를 떠올릴 수 있는 유물들이 전시된다. 앨리스 오찬 당시 사용했던 식기와 고종이 하사한 어사진뿐만 아니라, 외교 사절단 맞이 때 쓰인 각종 황실 물건과 장소가 재현됐다. 전시는 11월 24일까지다.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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