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 교수의 ‘한국이란 무엇인가’] <1> 새로운 서사를 찾아서
※ 한국의 정체성, 역사, 정치, 사상, 문화 등 한국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찾아 나가는 연재를 시작합니다. ‘칼럼계의 아이돌’이라 불리는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한국일보>에 3주 간격으로 월요일에 글을 씁니다.
영화 ‘다크 나이트’(2008)에 나오는 지방 검사 하비 덴트(애런 에크하트)는 불공정하고 부조리한 고담시에서 외롭게 정의를 수호하는 인물이다. 세상이 비록 부패로 얼룩졌더라도, 덴트와 같은 인물이 있기에 사람들은 절망하지 않는다. 물론 그 한 사람이 분투한다고 해서 세상이 갑자기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그의 존재를 통해 세상이 그래도 참고 살만한 곳이라고 위안할 수 있다. 세상이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서사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
정의를 투명하게 실현하고자 하는 열망에 불타는 덴트에게 보통의 악당들은 적수가 되지 못한다. 비록 범죄가 조금 늘어나고, 치안이 다소간 엉망이 되고, 부패한 정치인들이 여전해도, 덴트와 같은 인물이 건재 하는 한 고담시의 희망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희대의 악당 조커(히스 레저)는 다르다. 조커는 단순히 불공정과 부정의를 조장하고, 소요를 일으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덴트라는 존재 자체가 불가능함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리하여 정의란 근본적으로 불가능함을 증명하고자 한다. 자칭 타칭 정의의 화신인 덴트마저 진정한 정의의 사도가 아니라, 다만 정의의 외피만 쓰고 있는 위선적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폭로하고자 한다. 조커의 뜻대로 덴트마저 타락한 존재로 판명된다면, 이 세상은 부정의와 불공정이 판치는 곳 정도가 아니라, 정의와 공정이 아예 근본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곳임을 뜻하게 된다.
한국 현대사에서 운동권은 하비 덴트였다. 그들은 부정의 한 군부 정권을 상대로 영웅적으로 싸우는 정의의 사도임을 자임했다. 운동권이 마침내 정권을 잡았다는 것은 덴트가 마침내 고담시에 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 권력을 장악한 것과 같다. 그러나 비판자들의 눈에는, 이들 ‘전직’ 운동권조차 정의와 공익의 수호자가 아니며, 자신의 협애한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지극히 범용한, 다만 운이 좀 좋았던, 그러나 운을 실력으로 착각했던 존재들에 불과하다. 비판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권력을 쥔 전직 운동권이 돌이킬 수 없이 타락한 존재로 판명된다면, 이는 부정의를 표상했던 군부 정권이 타락하는 것과는 그 의미가 사뭇 다르다. 전직 운동권들은 누구보다도 투명하게 정의를 구현하는 존재로 자임하고 그것을 동력으로 권력을 쥐었기 때문에, 그들의 실패는 자칫 정의 자체의 불가능성을 의미할 수 있다. 그것은 곧 한국 현대사를 지탱해 오던 한 신화가 그 무능함을 드러낸다는 것, 그 신화에 기초해서 구성원들의 정열을 동원해 온 서사가 불가능해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전직 운동권들의 위선이 판명된다면, 그것은 다른 집단의 도덕적 무능력과는 다르다. 그 사태는 보편적 정의를 표상하는 이 사회의 능력, 공동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서사 가능성 자체에 대한 회의로 이어질 수 있다.
그리하여 결국 도래할 것은 조커가 열망하던 세계, 즉 자연상태(the state of nature)이다. 이 자연상태는 정치 질서가 도래하기 이전, 즉 인류의 시원 상태로서의 자연상태가 아니라 기존 질서가 대안 없이 회의에 빠졌을 때 도래하는 인공적인 자연상태이다. 더 이상 공익과 정의를 믿을 수 없게 된 나머지 차라리 다 같이 불행해지자고 할 때 자연상태는 시작된다. 자기가 속한 사회에 책임을 다하기보다는, 삶을 구경거리로 삼거나 개망나니로 살다가 죽기를 택할 때 이 자연상태는 시작된다. 이 자연상태 속에서 공익 추구는 사욕 추구로 바뀌고, 정의는 당파성으로 대체되고, 정치인의 공적 연설은 고성방가에 자리를 내주고, 무차별적인 공격성이 곧 권위주의 타파로 여겨지며, 타파된 권위의 자리는 책임 회피가 대신 메우고, 준법은 편법으로 대치되고, 탈권위는 무례함과 혼동되며, 책임이 있던 자리에는 자기방어가 들어선다. 이곳은 자신의 생각을 정당화할 자신이 없기에 타인을 더 과도하게 비난하는 세계, 모두가 마음에 죽창 하나쯤은 지닌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연(然)하는 세계, 혐오를 연료 삼아 상대의 의견에 잔혹한 댓글을 다는 세계,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혈안이 된 나머지 점점 저열해지고 있다는 감각마저 마비되는 세계, 당장 피를 흘리지는 않더라도 사실상 내전 중인 세계이다. 이러한 자연상태에서는 타인에 대한 선의를 키울 수 없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상상할 수 없고, 자기보다 큰 세계에 대한 시선을 유지할 수 없고, 자신과 세계가 나아지는 도정에 있다는 서사를 향유할 수 없고, 결국에는 위엄 있는 생존을 보장할 수 없다. 이런 세계라면 내일이 와도 한사코 깨어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마치 오지 않을 것 같던 내일은 자연상태에서 마저 반복해서 오는 법. 앞날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을 때, 가장 난감한 것은 다음날이 밝았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다소곳하게 비참한 아침이 온다. 가끔 죽고 싶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인간은 그래도 대개 살고 싶어 하는 존재이다. 살아도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은 존재이다.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심연을 늘 들여다보지는 않은 채로, 어느 정도의 희망을 유지한 채, 견딜 수 있는 정도로 현재를 희생해 가며, 나름대로 긴 안목의 삶을 가꾸고 싶은 존재인 것이다. 행복한 사람이 되지는 못해도,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존재인 것이다.
그러한 존재들이 모여 정치 공동체를 제대로 유지해 낼 수 없다면, 인공적 자연상태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면, 그것은 단순히 부동산의 폭등이나 입시의 불공정이나 신자유주의의 폐해나 친일파의 발호나 미 제국주의의 압력 때문만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정치 공동체가 갑작스레 튼실해진다면, 단순히 시장 원칙에 충실해서나,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서나, 여론조사를 자주 해서나, 전 국민적 이벤트를 자주 벌여서가 아니다. 정치 공동체의 유지와 지속에 필수적인 공적인 가치와 서사가 부재하는 한, 그에 기초한 의사소통 능력과 갈등 해소 능력이 고양되지 않는 한, 자연상태로부터의 탈피는 요원하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한국이라는 정치 공동체에 주된 연료를 제공해 온 민족주의적인 서사, (영화 ‘1987’이 보여 주는 것 같은) 86 운동권 세대가 주인공이 되는 정의의 서사는 이 공동체의 해체를 막을 수 있을 것인가.
‘다크 나이트’에서 덴트는 결국 조커에게 패배한다. 조커에 의해, 덴트는 역시 정의의 사도가 되기에는 너무나 무력하고 범용한 사람으로 판명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배트맨(크리스천 베일)은 덴트가 저지른 실패를 사실 자신이 했다고 뒤집어쓰고, 덴트가 여전히 정의의 사도라는 사람들의 믿음을 유지시키고자 한다. 덴트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으니까. 그 믿음 없이는, 고담시의 질서는 불가능하니까. 비록 사실이 아니라 픽션이라고 해도, 고담시의 유지를 위해서는 덴트의 신화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배트맨은 덴트를 대속(代贖)하며 공동체의 신화를 재건한다.
한국이 고담시일지는 모르나, 이곳에 배트맨이 없는 것은 확실하다. 한국이라는 고담시를 위해서 한국의 덴트는 자신의 신화를 스스로 재구축할 수 있을 것인가. 정치 역시 예술처럼 픽션을 만들고 유지하는 체제일진대, 소위 진보적 민족주의 서사나 보수 우파적 서사가 미래를 위해 유용한 픽션을 제공할 수 있을까. 한국 고대사를 둘러싼 논란이나 자본주의 맹아 논쟁이나 식민지 근대화론이나 모두 미래의 픽션을 제공하기 위해 한국의 과거를 경쟁적으로 해석해 왔다. 그들의 주장이 무엇이건, 최선을 다했고 또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일들, 어쩔 수 없었고 동시에 어쩔 수 있었던 일들, 성실했지만 꾸준하지는 못했던 일들, 두려워서 하지 못했던 그러나 때로는 과감했던 일들, 결핍이 있었으나 그 결핍을 메우고자 시도했던 시간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수모를 참은 시간들, 저력과 무기력을 동시에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시간들, 이루지 못한 꿈과 대답을 듣지 못한 애착 때문에 미쳐 간 시간들이 모두 이 땅의 역사 속에 있다. 문제를 느끼면서도 쉽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밤이 왔고, 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일들은 벌어지고 있으며, 제대로 갈무리되지 못한 기억들은 베개 밑에 놓여있다. 고이 접히지 못한 채 놓여있다. 정치 공동체는 곧 기억의 공동체라는데,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어떤 서사 속에서 살아갈 것인가.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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