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 민중 신심의 중심 폴란드 상>
전통 가톨릭 국가들에서 가톨릭이 권위를 잃고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교회의 세속화와 종교에 대한 무관심 등으로 한국의 가톨릭 신자 증가율도 지난해 사상 최저(0.9%)를 기록했다. 하지만 동유럽에서는 가톨릭이 여전히 생활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교황을 정점으로 종교적 권위를 내세우는 서유럽의 가톨릭과 달리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민중의 종교를 자임하는 동유럽 가톨릭의 힘이다. 최근 한국천주교주교회의가 주관한 동유럽 성지순례에 동행해 민중 신심의 자취를 찾았다. 신앙의 힘으로 국가와 민족을 지켜내고자 했던 민중 가톨릭의 역사를 2회에 걸쳐 돌아보고, 현대 종교의 사회적 역할을 짚어본다.
지난달 22일 오전 9시(현지시간) 폴란드의 옛 수도 크라쿠프에서 90㎞ 떨어진 인구 3만명의 소도시 바도비체. 성모 마리아 대성전(바실리카) 주위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미사를 올렸다. 주말 미사에 몰려든 인파로 이미 성당은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했다. 이날 미사에는 크라쿠프에서 온 이들도 꽤 있었다. 성당은 성 요한 바오로 2세(1920~2005) 교황이 태어나 유아 세례를 받고 유년기를 보냈던 곳이다. 성당 앞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바로 옆에 있던 그의 생가는 현재 박물관으로 보존돼 있다. 연간 100만명 이상이 이곳을 다녀간다.
생가에는 어린 시절 요한 바오로 2세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첫 영성체를 한 9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퇴역 장교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의 사진과 유품을 둔 거실, 아버지와 그가 사용했던 침실, 성당 옆의 해시계가 보이는 부엌 등 세 칸의 공간을 단출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검박한 삶을 대변하는 듯했다. 크라쿠프의 야겔로니카 대학에서 문학과 철학을 전공했던 그는 1939년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폴란드 점령으로 채석장에 끌려가 강제노동을 했다. 전쟁의 궁핍했던 삶에 1941년 아버지가 죽자, 그는 시신 곁에서 12시간을 보내다 사제의 길을 결심했다. 1946년 사제품을 받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대중을 위한 사목활동을 펼쳤다.
1967년 추기경에 올랐고, 1978년에는 456년만의 이탈리아 출신이 아닌 교황이자 최초의 슬라브인 교황에 선출됐다. 당시 공산체제 하에 반목과 갈등을 겪던 폴란드인들은 그가 교황으로 선출된 이듬해 본격적으로 민주화 투쟁을 시작하게 됐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 선출 후 첫 고향 방문 연설에서 “폴란드는 1,000년 역사를 함께 겪어온 한 민족이며, 다같이 그리스도를 섬겨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는 결코 서로 다르지 않으며, 오랜 기간 이곳에서 함께 살아왔다”며 우회적으로 단결을 당부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역대 교황 중 처음으로 1984년 한국을 방문해 103위복자에 대한 시성식을 집례했다. 1989년 다시 방한했다. 65만여명이 운집한 여의도광장에서 남북한의 화해를 바라는 평화 메시지를 낭독해 감명을 줬다. 재임 기간 중 104차례에 걸쳐 해외를 순방하는 등 ‘실천하는 민중의 지도자’의 표본이었다. 그의 생가 안내 담당자는 “전쟁과 공산정권 등으로 갈등과 분열을 겪었던 폴란드인들에게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민족적인 자긍심을 불러 넣고 종교적인 단결을 강조한 영적 지도자였다”고 말했다. 폴란드는 인구의 97%(3,706만4,000명)가 가톨릭 신자다.
크라쿠프에서 북쪽으로 150㎞ 떨어진 쳉스토호바의 야스나고라 수도원도 폴란드의 신심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해발 252m 언덕을 올라 수도원 성당 내로 들어서면 수천 개의 묵주와 십자가 등의 성물과 장애인용 목발과 다리 교정기 등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이곳을 방문한 신자들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는 의미로 봉헌한 물건들이다.
폴란드의 최대 순례지로 꼽히는 이곳에는 오른쪽 뺨에 두 줄의 상처가 선명한 ‘검은 성모(블랙 마돈나) 성화(121.8X81.3㎝)’가 있다. 성화를 가지고 있던 헝가리 귀족이 1382년 성화를 실은 마차가 이곳을 지나다 움직이지 않자, 수도원을 지어 성화를 보호했다. 1430년 수도원을 습격한 후스(체코의 종교개혁가)파가 성화를 칼로 내리치면서 상처가 생겼다. 이후 여러 화가가 상처를 지우려 했지만, 지워지지 않았다. 성모의 상처는 폴란드가 겪어온 시련의 상징이 됐고, 수도원은 고난이 닥쳤을 때 힘과 용기를 얻기 위한 성지로 자리매김했다. 안내를 맡은 시몬 성 은수자회 수사는 “성화를 언제, 누가 그렸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오랜 세월 이곳에서 민중을 지켜준 성모는 폴란드인들의 영적 신앙의 원천과도 같다”고 말했다. 매년 500만명 이상이 성화를 보기 위해 이곳을 방문한다.
현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톨릭의 여러 화두 중에서도 특히 자비를 강조해왔다. 교회는 말로만이 아니라 생활의 증거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전해야 한다(교황청 회칙13항)고 명시하기도 했다. 크라쿠프 와기에브니키의 ‘자비의 성모 수녀원’은 이 같은 자비의 신심을 가장 강렬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성녀 마리아 파우스티나 코발스카(1905~1938)가 이곳에서 생활하다 선종했다. 환시로 접한 예수님의 메시지를 ‘하느님의 자비’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전한 인물이다. 수녀원 성당 내에는 맨발 차림으로 심장에서 광채가 발산되는 모습의 예수님을 그린 상본(하느님, 성인을 묘사하여 만든 카드 모양의 화상)이 걸려 있고, 파우스티나 성녀의 무덤이 있다. 성녀에 따르면 맨발로 추위에 떨던 예수는 그로부터 따뜻한 음식을 대접받은 후 “내가 맨발로 와서 따뜻함을 느꼈듯, 모든 이들이 나와 같은 따뜻함을 누릴 것이다”란 메시지를 전했다. 2차 대전 때 수많은 폴란드인들이 성녀의 무덤 앞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간구하면서 유명해졌다. 1992년 크라쿠프대교구장은 이곳을 ‘하느님의 자비 성지’로 공식 지정했다. 한국 팔로티회 분당 수도원에도 그의 유해 일부가 안치돼 있다.
자비의 성모 수녀회의 엘쉬비에타 시에파크 수녀는 “성녀는 어렸을 때 불우했고, 가난했고, 많이 배우지 않았지만, 예수님이 그를 통해 ‘자비’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며 “자비는 성녀처럼 추위에 떠는 이들에게 따뜻한 밥 한끼를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바도비체ㆍ쳉스토호바ㆍ크라쿠프(폴란드)=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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