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9일, 문재인 대통령은 조국 민정수석을 신임 법무부 장관 후보로 내정했고, 9월 9일 법무부 장관에 임명했다. 그 사이에 한국 사회는 ‘조국 대전’에 돌입했고, 임명이 마무리 되고도 내전은 진행중이다. 나는 8월 22일과 9월 5일에 쓴 칼럼에서 조국사태를 언급했지만, 조국은 두 번 다 번외의 주제였다. 그러나 현재 내 컴퓨터에는 ‘조국 강남좌파’ ‘조국 검찰개혁’ ‘조국 계급론’ ‘조국 교육 입시’ ‘조국 세대론’ ‘조국 정치공학’ ‘조국 촛불’ ‘조국 폴리페서’와 같은 항목으로 분류된 기사와 칼럼이 70여 쪽 넘게 정리되어 있다. ‘조국 열공’을 한 것이다.
한국일보 9월 9일 자에 난 임지현 서강대 교수의 특별 기고는 시종일관 “보수와 좌파의 차이는 아마도 부끄러움”에 있을 것이라면서, 부끄러워해야 좌파이고 사람일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부끄러움은 왜 좌파의 전유물이어야 할까? 자유한국당의 나경원 원내대표만 하더라도 서울대 의대 실험실을 아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인맥을 활용하고 위력을 발휘했다. 마치 “미국 고등학교를 최우등 졸업”하면 서울대 실험실을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기는 것처럼 강변하면서 본인의 의혹을 조국 사태에 대한 물타기라고 항변하는 나 의원에게는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다. 임 교수의 논리대로라면, 우파는 원래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조국 대전의 첫 번째 전선은 좌파 지식인 혹은 고위 공직 후보자의 도덕적 언행일치 여부였다. 우리는 그들에게 어느 강도만큼의 도덕적 언행일치를 요구할 수 있을까. 작년 말에 출간된 박구용의 ‘문파, 새로운 주권자의 이상한 출현’(메디치, 2018) 제6장은 이 문제의 폐색을 풀 수 있는 참고 사항을 제공한다. 지은이는 현대 사회는 공자 시대와 같은 도덕적 언행일치를 더는 보장해 주지 못한다면서, “사회적 복잡성의 폭발적 증가와 변화 속도의 가속화는 386 입진보(말로만 진보)들만이 아니라 성인군자들조차도 말과 말, 행위와 행위의 일치를 지향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고 말한다. 즉 극단적으로 부조리하고 모순된 사회에서는, 예컨대 “난 말을 못해!”라고 말하는 수행적 모순(performative contradiction)을 범하는 횟수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난 말을 못해!”라고 말한 사람이 이미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배반한 것처럼, 대학 입시가 일생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극단적인 사회에서는 평소에 공정 사회를 갈구했던 부모들마저 자녀의 교육 문제에서는 수행적 모순을 저지르고 만다.
플라톤의 세계에서는 진ㆍ선ㆍ미라는 본질이 있고, 저급한 현상(현실)은 거기에 부응해야 한다. 이런 진리 부응설(언행일치)은 존중할 가치가 있지만, 극단적인 모순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그것이 강제될 때는 부작용이 생겨날 수 있다. 자녀를 위해 모두가 ‘스펙 품앗이’에 나선 사회에서 능력이 있는데도 부모가 지원을 거부하거나, 능력이 없어서 아예 부모의 지원을 못 받는 아이만 손해를 보는 것이다. 때문에 지은이는 본질보다 현상이라는 맥락을 살피면서 “언행일치와 같은 강한 도덕적 규범을 상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슬람에게 술은 금지된 음식이다. 하지만 마크 포사이스의 ‘술에 취한 세계사’(미래의창, 2019)를 보면, 대부분의 칼리프와 이슬람 고위 성직자들은 여러 가지 구실을 대어 술을 즐겼다. 이슬람 성직자들은 술을 마시기 위해 항상 ‘코란’에 의지했는데, 이들은 무함마드가 금지한 원료가 전혀 들어가지 않은 다양한 재료로 술을 만들었다. 인삼이나 쌀로 빚은 술은 ‘코란’이 금지하지 않았으니 마셔도 된다는 식이다.
근본주의자는 ‘성서’나 ‘코란’을 문자 그대로 따르는 사람이며, 이들은 “꼭 막히기는 했지만, 투철한 신앙인”이라고 가정된다. 하지만 앞서 나온 이슬람 성직자들의 예는, 근본주의자들이야말로 아무것도 믿지 않는 이들이라는 것을 보기 좋게 폭로한다. 조국 사태 때 도덕과 언행일치 잣대를 광선검(光線劍)처럼 휘둘렀던 논객들도 이와 같다. 이들은 본질을 말한다면서 현상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냉소하는 구경꾼들이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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