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점자블록은 1990년대에 보행 교육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도 극소수만 기억하고 있을걸요. 지금은 가르치지도 쓰지도 않는 거라···.” 8일 서울 지하철 종로3가역에서 만난 시각장애인 홍서준(39)씨가 바닥에 설치된 점자블록을 흰 지팡이로 더듬으며 말했다. 가로세로 각 20㎝ 크기의 이 정사각형 블록은 중앙의 돌출점 주위에 큰 원이 양각된 형태로, 얼핏 보아도 일반적으로 쓰이는 점형 또는 선형블록과 전혀 다르게 생겼다. 그런데 이 역사 내 3호선과 1호선 환승 통로 바닥에만 1,300여 개 이상이 깔려 있다. 어찌 된 일일까.
해당 점자블록은 1996년부터 1998년까지 서울시내 다수의 지하철 역사에 설치됐으며 ‘환승’을 뜻한다. 그 외에도 점형과 선형을 비롯해 ‘화장실’ ‘공중전화’ ‘매표소’를 의미하는 각기 다른 형태의 점자블록이 이 시기 설치됐다. 그러나 1998년 ‘장애인ㆍ노인ㆍ임산부 등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이 시행되면서 점형과 선형 두 종류만 표준 점자블록으로 인정돼 시각장애인의 공식 길잡이 언어로 정착했다. 그 후 화장실이나 공중전화, 매표소를 뜻하는 점자블록 대다수가 표준 블록으로 교체됐지만 유독 ‘환승’을 의미하는 블록은 20년 넘게 방치돼 혼란을 빚어 왔다. 해당 점자블록에 대해 교육을 받지 못한 대다수 시각장애인들은 뜻을 알 수 없는 이 ‘이형’ 블록이 의아할 따름이지만 대부분 ‘그러려니’ 하고 지나친다.
점형 및 선형 블록이라도 법률 시행 이전 설치된 경우 크기나 색깔, 돌출점의 개수 등 규격에 맞지 않는 것들이 적지 않다. 법이 규정한 표준 점자블록은 가로세로 각 30㎝ 크기에 점형은 36개의 돌출점을, 선형은 4개의 돌출선을 가져야 하고 색깔은 황색을 기본으로 하되 바닥재와 구분이 안 될 경우에만 다른 색깔을 설치할 수 있다. 환승 블록을 포함해 이처럼 규격에 어긋난 ‘이형’ 점자블록은 현재 종로3가역을 비롯해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삼성, 잠실, 성수 등 12개 지하철 역사에서 표준 블록과 뒤섞여 설치돼 있다. 지난 20년간 이를 방치해 온 서울교통공사는 8일 올해 12월부터 2022년까지 문제가 된 점자블록을 모두 교체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시각장애인편의시설지원센터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홍씨는 점자블록의 또 다른 문제를 지적했다. 시각장애인의 이동 편의를 위해 설치된 점자블록이 환경 변화를 따라잡지 못해 오히려 이동권을 제한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하철역 출구 방향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 앞에 서자 진행을 유도하는 선형 블록 대신 위험 시설 또는 장애물이 앞에 있음을 경고하는 점형 블록만 설치돼 시각장애인의 진입을 막고 있었다. 홍씨는 “시각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계단보다 에스컬레이터를 선호하는데 방향을 유도하는 선형 블록이 계단 쪽을 향해서 설치된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계단이 에스컬레이터로 바뀌는 등 지하철 이용 환경이 변하고 있는 만큼 지하철 운영 주체에 개선을 요구하고 있지만 반응 속도는 더디다”고 말했다.
역사를 나와 홍씨와 종로 거리를 잠깐 동행하는 사이 점포 입간판부터 노점 리어카 등 장애물이 적지 않게 나타났다. 홍씨는 “지하철 역사 내부에서야 ‘그러려니’ 하며 다닐 수 있지만 바깥에서 갑자기 맞닥뜨리는 장애물은 위험천만”이라고 말했다. 차량의 보도 진입을 막기 위해 설치한 ‘볼라드’가 특히 문제다. 재질이나 높이가 규정에 맞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볼라드 앞 30㎝ 위치에 설치돼 있어야 할 점형 블록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시각장애인들이 볼라드를 가리켜 ‘보도 위의 흉기’라고 부르는 이유도 거기 있었다.
그 밖에 심하게 파손되거나 아예 통째로 빠져버린 경우도 시내 곳곳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0.4~0.7㎝ 높이의 돌출점이나 돌출선이 닳아 제 기능을 못하는 점자블록도 흔했다. 홍씨는 “지자체 등에 여러 차례 민원을 내 점자블록 교체를 요구해 봐도 예산 핑계만 늘어놓을 뿐 개선이 안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시각장애인의 편의보다 행정 편의를 우선으로 예산을 집행하다 보니 우리도 모르는 이형 블록이 20년 넘게 방치돼 온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는 점자 표지판을 점검하러 간다며 용산역으로 향했다. 시각장애인의 권리 보장을 위한 ‘흰 지팡이의 날’을 일주일 앞둔 이날 오후 흰 지팡이에 의지한 홍씨의 발걸음은 여전히 위태로워 보였다.
김주영 기자 will@hankookilbo.com
박서강 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윤소정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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