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 넘쳐나는 ‘악플 공화국’ … 연예인 사이버 테러 독해져
악플이 오락의 소재 되기도… “혐오표현 금지법 등 규제 필요”
30대 가수 A씨는 10년째 불면증 치료 약을 먹고 있다. 자신을 온전히 지키기 어려웠던 20대 데뷔 시절, 악성 댓글(악플)과 감옥 같은 연예계 시스템에 시달려 마음이 부서진 탓이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바탕으로 해 개인적인 불행을 조롱하는, 그에 대한 댓글은 보이지 않는 ‘칼’이 돼 그의 머릿속에 박혔다.
A씨는 대인기피증까지 걸렸다. 악플에 시달리다 지난 14일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된 아이돌그룹 에프엑스 출신 설리(본명 최진리ㆍ25)와 비슷한 나이에 겪었던 일이다. A씨는 15일 한국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다른 사람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가란 생각에 빠지면 밖에 나가기도 사람을 만나기도 두려워진다”며 “모두가 날 욕하는 것 같아 나 스스로를 부정하게 됐고 극단적 선택을 하려 한 적도 있다”라고 옛 얘기를 어렵게 꺼냈다.
◇혐오사회ㆍ오디션 열풍에 더 가혹해진 괴롭힘
떼 지어 몰려와 쏟아내는 온갖 비방에 속수무책으로 스러진 이는 설리만이 아니었다. 2007년 가수 유니가, 2008년엔 배우 최진실이 악플을 견디다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사회에 큰 파장을 던진 안타까운 일들이 일어난 지 10여 년이 지났지만 유명 연예인을 향한 ‘사이버 테러’의 폐해는 계속됐다.
여러 차례 경종에도 불구하고 온라인 괴롭힘의 수위는 오히려 더 세졌다. 계층 양극화를 넘어 혐오사회가 도래하면서 온라인엔 악성을 넘어 ‘독성 댓글’(독플)이 넘쳐난다. 2010년대 오디션 프로그램이 유행하면서 대중문화는 악플에 되레 둔감해졌다. 편견에 근거한 폭력적 언사들이 ‘평가’라는 미명 아래 정당화됐다. 연예인이 세상의 관심으로 인기를 얻고 명성을 얻는 만큼 혹평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는 기이한 논리가 생겨나 폭력적인 온라인 문화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오디션 프로그램 출신 가수 B씨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쏟아지면서 세상 사람 모두 전문가가 됐다”며 “그 환경에서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악플을 보다 보면 내가 사라지는 기분”이라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정신과 상담을 받아도 악플이 남긴 상처는 쉬 아물지 않는다. 전화로 만난 연예인들은 “악플은 극복할 수 없다”며 “(악플이라는 현실에) 그저 익숙해 질뿐”이라고 입을 모았다. 인터넷 선진국을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악플 공화국’인 한국의 어두운 현실이다.
◇ “가학적 환경에 감정 표출 금지”… 멍드는 아이돌
K팝 아이돌은 악플 공화국에서 가장 취약한 먹잇감이다. 소년과 소녀들은 단식을 강요받고, 바쁜 일정에 쫓겨 수면을 충분히 취하지도 못하지만 정작 무대에선 건강한 웃음을 강요받는다. 가학적 환경에서 웃음을 짓지 않거나 비판적 목소리를 내면 물어 뜯기기 십상이다. 어린 아이돌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통한 감정의 표출도 자유롭게 할 수 없다. 기획사가 규제하기 때문이다. 음악에서 제 목소리를 낼 수도 없다. 기획사에서 준 곡에 맞춰 노래하고 춤을 춰야 한다. 내 것이 없는 것 같은 공허감에 악플까지 겹치면 아이돌은 쉽게 상처받는다. 김상화 음악평론가는 “아이돌을 욕해도 되는 존재로 취급하는 게 대중”이라며 “이런 폭력적 시선과 말에 대해 감정 배출조차 제대로 할 수 없으니 속이 곪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 유명 음악지인 빌보드는 15일 설리가 떠난 K팝 시장을 두고 ‘여성들이 대중의 반발을 감수하지 않고선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할 수 없다’고 꼬집었다.
◇인권 경시 ‘혐오 비즈니스’
연예인도 감정 노동자다. 하지만 연예인의 감정적 고통조차 웃음의 소재로 활용된다. 설리가 진행을 맡았던 JTBC2 예능프로그램 ‘악플의 밤’은 악플을 시청률 상승을 위한 지렛대로 삼고 있다. 출연자가 자신의 악플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콘셉트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비판 받아 마땅한 악플이 오락의 소재가 되는 건 문제”라고 지적했다.
큰 폐해에도 불구하고 악플이 기승을 부리는 건 혐오 발언에 대한 사회적 규제가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영국, 독일 등과 달리 한국엔 ‘혐오 표현 금지법’이 없다. 설리의 사망 기사엔 입에 담지 못할 정도로 도가 지나친 모욕적인 댓글이 달렸다. 포털사이트는 설리의 사망 기사에 댓글 작성 규제를 하지 않았다. 혐오를 묵인해 돈을 버는 ‘혐오 비즈니스’가 악플을 키운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시장의 상업 논리에 누군가의 인권이 담보로 잡힌 셈”이라며 “일정 기간이 지나면 댓글을 일괄 삭제하는 방안 등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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