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심한 학자가 “광장의 파시즘이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는 칼럼을 썼다. 이 분을 딱히 분류해보라면 진보보다는 보수라고 해야겠지만, 원래는 그냥 ‘아둔한 편’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아둔한 이들이 꽤 많다. 각기 ‘조국 수호’와 ‘조국 사퇴’를 구호로 내걸고 서초동과 광화문에 모인 시위 참여자들을 앞장서서 ‘파시스트’라고 낙인찍고, 또 양 진영이 벌이고 있는 집회 랠리(rally)를 ‘파시즘’의 도래라고 비아냥거려야만 속이 시원한 ‘좌좀(좌파 좀비)’들이 그렇다.
경색된 좌파 근본주의자들은 서초동에 모인 시민들에게 무척 비겁한 프레임을 뒤집어씌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서초동에는 김용균이 없다, 김용희가 없다, 톨게이트 노동자가 없다…’ 하지만 서초동에 진짜 없는 것은 노동자에 대한 연민이나 연대가 아니라 좌좀들이 강요하는 배중률(排中律)이다. 배중률은 둘 중에 하나만이 반드시 참이어야 하고, 모순되는 두 개의 명제 밖의 제 3의 명제에 참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한다. 서초동의 중산층 시위자들이 좌좀들을 만족시켜줄 만큼 노동이나 계급 문제에 급진적이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김용희나 톨게이트 노동자에게 무심하거나 적대적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억측이다. 서초동에는 좌좀이 들이대는 배중률이 없다.
잡동사니 이론과 실천으로 구성된 파시즘의 기본 특질 가운데 하나는 무력(테러)과 공포정치다. 대개의 파시즘 정권은 정권을 차지하기 전에 경쟁 세력을 제압할 무력 단체를 운용한다. 무솔리니의 ‘검은 셔츠단’과 히틀러의 돌격대(SA)가 그것이다. 하지만 파시즘 정권이 들어서고 나면 이 무력 단체들은 해체되고, OVRA(무솔리니의 반 파시스트 검속 비밀경찰)나 게슈타포 같은 공권력이 그 역할을 승계한다. 한국의 경우 정당성이 취약했던 이승만 정권은 정권 내내 비국가 폭력 자원인 조직 폭력단의 힘을 빌렸고, 정당성을 표 나게 과시했던 박정희 정권은 중앙정보부와 검ㆍ경 같은 국가 공권력을 사용했다. 존슨 너새니얼 펄트의 ‘대한민국 무력정치사’(현실문화, 2016)에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이승만ㆍ박정희 정권은 음성과 양성으로 이루어진 무력(테러)을 구사하며 공포정치를 펼쳤던 파시즘 정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거기에 반해 문재인 정권은 정권 유지를 폭력에 의지하고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좌좀들이 파시즘의 징후를 맡았다고 광광 짖어대는 서초동과 광화문의 시위대들 역시 누구의 검은 셔츠단이나 누구의 돌격대가 아니다. 좌좀들은 광장에 모인 시민들을 향해 ‘멍청이, 파시스트, 노예’라고 비웃는 짓을 멈춰야 했다.
한국의 좌좀들은 정치권과 두 개의 광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조국 대전’을 지배계급 내 분파들끼리의 권력 투쟁으로 간주하고, 계급이나 노동 문제가 아닌 한 팔짱을 끼고 있는 것이 가장 올바른 태도라고 여겼다. 하지만 2019년 현재, 계급투쟁 이외에는 정치가 될 수 없다고 말하는 좌파는 세계 어느 구석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좌파는 여성주의나 생태주의와 같은 의제를 수용하라는 요구를 외면하지 않으며, 그들과 어깨동무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직 후진적인 사법 제도와 검찰 권력이 시민 사회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나라에서 검찰 개혁은 왜 정치가 아닌가?
시민들은 로또를 사기 위해, 영화를 보기 위해, 소문난 식당에서 무엇을 먹기 위해 긴 줄을 선다. 시민들은 컴퓨터게임하기 위해, 외국의 프로 축구를 보기 위해, 올래길을 걷기 위해 기꺼이 돈과 시간을 쓴다. 저렇게 허비한 열정이 모두 계급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강변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편협한 소견을 드러낸 것이다. 광장에 모여 시위를 하는 것은 시민들의 평범한 일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즐거워할 뿐 아니라, 자신과 사회를 위해 보람찬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자신의 시간ㆍ돈ㆍ열정을 자발적으로 바친 이들이 팔짱을 낀 구경꾼들에게 능욕을 당해야 할 이유는 없다. ‘쎈 말’을 늘어놓는 좌좀들 치고 자신의 생계나 존재 근거가 자본주의 체제에 기생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다. 전체(All)의 일부이면서 초월자 흉내를 내는 것은 급진이 아니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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