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년 만에 평양에서 열린 남자 축구대표팀간 경기에서 한국 선수들은 거친 전투를 치러야 했다. 선수들은 다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했고, 대한축구협회 임원은 축구라기 보다 전쟁 같았다고 했다. 축구협회가 취재진을 상대로 공개한 경기 영상에선 북한의 ‘매너 실종’ 축구를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었다.
베일에 감춰졌던 한국 대표팀의 2022 국제축구연맹(FIFA) 카타르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예선 평양 원정 경기가 17일 서울 종로구 축구회관에서 국내 취재진에 공개됐다. “(축구가 아닌)전쟁을 치르는 것 같았다”던 최영일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얘기처럼 이날 경기는 초반부터 난투극이 우려될 정도의 거친 신경전과 몸싸움이 계속됐다. 자칫 집단 충돌로 이어질 위기도 여럿 있었다. 전반 7분쯤 나상호(23ㆍFC도쿄)의 공중볼 경합 중 신체접촉으로 격앙된 남북 선수들이 몰려들며 위기가 연출됐다. 전날 요아킴 베리스트룀 북한 주재 스웨덴 대사가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영상에 담긴 장면이다. 19분엔 북한 리운철(24)이 황인범(23ㆍ밴쿠버)에 퇴장을 줘도 이상하지 않을 위험한 태클을 시도했다.
이후엔 주장 손흥민(27ㆍ토트넘)에 대한 집중견제가 이뤄졌다. 손흥민 전반 12분 북한 수비 발에 걸려 심하게 넘어지며 부상 위험을 겪었고, 전반 37분과 44분엔 손흥민을 향한 북한 수비수들이 강하게 충돌하며 위협했다. 전반 초반 두 팀 선수들의 싸움을 말리는 입장이었던 손흥민조차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후반 들어서도 좀처럼 거친 분위기가 가라앉지 않았다.
이날 최영일 부회장은 인천국제공항서 취재진과 만나 “여태 그런 축구를 본 건 처음”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는 기술적으로, 정상적 경기를 하려고 했는데 경기 자체가 매우 거칠어졌다”면서 “우리 선수들의 부상이 크게 염려됐고, 부상 없이 잘 끝난 거로 만족하는 경기였다”고 덧붙였다.
손흥민도 “심한 욕설이 오가기도 했다”며 “북한의 작전이었을 수도 있지만, 누가 봐도 거친 플레이를 했고 예민하게 반응했다”고 전했다. 이어 “안 다쳐야겠다는 생각을 먼저 해야 했고, 경기장도 항상 하던 곳이 아니라 부상 위험이 컸다”고 말했다. 경기 과정에서 흔히 있을법한 몸싸움이 아닌, 부상이 염려될 법한 폭력에 가까웠단 게 선수들 얘기다. 상대 거친 태클 등으로 부상위험을 겪은 겪은 황인범은 서울에서의 복수전을 다짐했다.
반면 경기 내용만 놓고 보면 북한의 기동력과 강력한 전방 압박에 제대로 실마리를 풀지 못한 답답한 경기였다. 심지어 벤투호는 전반전 동안 '유효슈팅 제로'에 그친 실망스러운 경기력을 드러냈다.
중국 베이징을 거쳐 평양을 찾은 우리 선수단은 북한의 철저한 통제 속에 경기 외 시간엔 호텔에서만 생활해야 했다. 숙소인 고려호텔에서 어떤 통신 조차 사용하지 못한 채 머물다 귀국길에 올라야 했다. 축구협회는 “FIFA와 AFC 규정을 면밀히 검토한 뒤 어떤 방식으로 북측에 이의제기를 할지 고민해볼 것”이라고 했다.
김형준 기자 mediaboy@hankookilbo.com
강주형 기자 cubi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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