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달 16일 치러지는 스리랑카 대선의 주요 후보이자 전직 국방부 장관인 고타바야 라자팍사는 지난 12일 친형인 마힌다 라자팍사 전 대통령과 함께 이 나라 중부에 있는 폴루나루와로 향했다. 두 사람은 그곳 불교사원에서 ‘특별 종교 프로그램’을 수행한 뒤, 승려들에게 선거 이야기를 꺼냈다. 현지 언론 ‘뉴스퍼스트’ 보도에 따르면, 마힌다는 “유권자들이 (남부 도시) 엘피티야 시의회 선거처럼 대선 투표일도 간절히 기다린다”고 운을 뗐다. 전날 엘피티야 시의회 선거에서 라자팍사 형제가 속한 스리랑카인민전선(SLPP)은 압승을 거뒀다. 그는 “선관위원장은 승려들이 사원에서 정치적 의사를 표명해 주길 기다린다”고 덧붙였고, 이에 한 승려도 “30년간 투표한 적이 없지만, 이번 선거는 중요한 만큼 꼭 투표권을 행사하겠다”고 답했다.
고타바야는 지난 8월 11일 SLPP 대선 후보로 지명됐다. SLPP는 스리랑카의 오랜 주류 정당 중 하나인 스리랑카자유당(SLFP) 중심의 인민연합자유동맹(UPFA) 내에서 ‘라자팍사 형제 충성파’가 분파해 2016년 설립한 당이다. 이번 대선에선 SLFP도 결국 고타바야를 지지하기로 했다. 그는 이제 SLFP의 전통적 지지 기반도 잘 흡수해 가는 중이다.
스리랑카는 주류 싱할라족의 ‘불교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사회다. 스리랑카 불교가 늘 정치적이고 이따금 ‘전투적’ 성격마저 보인 건 그런 탓이다. 2014년 무렵 두드러졌던 ‘안티-무슬림’이라는 혐오와 폭력의 이면에는 불교 극단주의 세력이 배후나 주동자로 등장했다. 최근에도 북부의 소수 타밀 지역인 물라이티부에서 법원의 금지 명령에도 불구, 불교 사원 건축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또, 근래 사망한 승려 나야루 라자마하 비하라의 장례 마지막 절차를 굳이 물라이티부의 힌두 사원 인근에서 치르겠다며 소란을 피우는 이들도 있다. 바로 불교 극단주의 조직인 보두발라세나(Bodu Bala Senaㆍ‘불교도의 힘’이라는 뜻, 이하 BBS) 소속 승려들이다. 이들은 심지어 스리랑카에 ‘싱할라 불교 국가’가 수립돼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고타바야는 이런 BBS의 ‘뒷배’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불교 극단주의 단체들은 2004~2015년 대통령과 국방장관으로 각각 재임하며 최고 권력을 행사했던 라자팍사 형제의 집권 말기에 급성장했다. 이들 형제는 휘발성 강한 종교를 정치에 끌어들이고, 남아시아의 고질적 병폐 중 하나인 ‘커뮤널리즘(communalismㆍ커뮤니티 라인에 집착하며 분열과 갈등을 유발하는 이데올로기)’을 선거운동에 이용하고 있다. 종족 갈등과 대학살을 경험했던 이곳에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지난 9일 중부 도시 아누라다푸라에서 열린 첫 옥외 집회 도중 고타바야는 중요한 공약 하나를 내세웠다. “(대선에서 당선되면) 말도 안 되는 혐의로 감옥에 갇혀 있는 전쟁 영웅들을 모두 석방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는 “(11월) 17일 동이 트자마자 풀어줄 것”이라고도 했다. 여기서 언급된 ‘전쟁 영웅’이란 고타바야의 국방장관 재직 시절 횡행했던 이른바 ‘화이트밴 납치’에 관련된 정보국 인물, 그리고 강간과 살해 등에 연루돼 기소된 소수의 군인을 가리킨다. 하지만 다수가 이미 석방됐다. 스리랑카 경찰국에 따르면, 그렇게 수감된 48명 중 41명이 이미 자유의 몸이 됐고, 지금은 7명만 감옥에 있는 상태다.
사실 고타바야는 대선 승리를 거둬야 할 ‘개인적 사유’가 있다. 현재 그는 2009년 5월 종식된 내전의 막바지에 자행된 각종 고문과 납치, 암살의 배후로 고발돼 있다. 형사 처벌 가능성이 있는 피고발인 신분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대통령에 오르면 면책특권으로 처벌을 면할 수 있다. 게다가 미국 캘리포니아주 법원에 계류 중인 두 건의 소송에도 직면해 있는데, 오히려 이 부분이 더 큰 뇌관이 될 수도 있다.
우선 고문을 명령ㆍ총괄한 혐의에 대한 소송이 있다. 원고는 스리랑카 타밀 태생의 캐나다 시민권자인 로이 사마타남이다. 그는 2007년 고향 스리랑카를 방문하는 길에 납치됐고, 악명 높은 ‘테러리즘조사국(TID)’에 끌려가 3년간 모진 고문을 당한 뒤에야 풀려났다. 석방 후 그는 이 사실을 폭로했다. 인권단체 ‘국제진실정의프로젝트(ITJP)’는 지난 4월 9일 사마타남의 대리인 자격으로 캘리포니아 법원에 고타바야를 고발했다. 그가 고문 가해자들의 직속 상관이었기 때문이다. ITJP에 따르면 지난 14일 현재 이 소송의 원고(고문 피해자)는 11명으로 늘어났다.
두 번째 소송은 ‘기자 암살’을 지시한 혐의로 같은 법원에 제기된 것이다. 2009년 1월 8일 스리랑카 일간지 ‘선데이 리더’의 편집장이었던 라산타 위크레마퉁가는 수도 콜롬보 거리에서 대낮에 살해됐다. 당시는 스리랑카 내전 보도에 대한 검열이 극심했던 시기다. 정부군의 대학살에 비판적 목소리를 냈던 기자들은 ‘화이트밴 납치’의 표적이 되거나, 해외 망명길에 오르며 하나둘 사라졌다. 고타바야는 군정보국 산하 화이트밴 납치팀 ‘트리폴리 플래툰’을 비밀리에 운영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크레마퉁가 편집장 암살의 배후로도 지목됐다.
이 소송을 낸 원고는 피해자의 딸인 아힘사 위크레마퉁가다. 아힘사는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정의와 책임 센터(CJA)’와 손을 잡고 올해 4월 11일 소장을 제출했다. 근거 법률은 ‘고문피해자 보호법(TVPA)’과 ‘해외불법행위 피해자 구제법(ATS)’ 등 두 가지다. 모두 미국 시민권자가 아니어도 고발 주체가 될 수 있다. 다만 조건이 있다. 소송 제기 시점에 피고가 미국 시민권자이거나 미국 영토에 머무르는 등 ‘미국의 사법 관할’하에 있어야만 한다는 점이다. 현재 고타바야의 ‘시민권 논란’이 계속되는 건 그의 대통령 후보 자격 유무가 바로 이 국제 소송과 연계돼 있기 때문이다.
스리랑카는 이중국적 희망자에게 일정한 절차와 심사를 거쳐 허가증을 발급해 준다. 하지만 대선 출마 자격은 오로지 ‘스리랑카 국적만 보유한 사람’으로 제한돼 있다. 고타바야는 “올해 4월 17일 미국 시민권을 반납했다. 지금은 오직 스리랑카 국적자일 뿐”이라면서 대선 출마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지난 9월 27일 찬드라굽타 테뉴와라 교수와 가미니 비얀고다 등 시민운동가 두 명이 “얼마 전까지 이중국적 소지자였던 고타바야가 애당초 허가증을 받는 과정이 적법하지 않았다”며 법원에 검토 요청을 한 일이 있었다. 그들에 따르면 고타바야는 2003년 스리랑카 국적을 버리고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2년 후인 2005년 7월 귀국한 그는 같은 해 11월 형 마힌다가 대통령에 오르자 속전속결로 ‘이중국적 허용’ 절차를 밟아 스리랑카 국적을 회복했고, 곧바로 국방장관에 임명됐다. 문제는 이중국적 허가증 발급 기관이 내무부라는 점에서 내무장관 서명이 필요함에도 불구, 고타바야를 위해 ‘사인’을 해 준 인물은 마힌다였다는 사실이다. 시민운동가들은 이를 지적하며 불법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지난 8일 법원은 위법이 없었다면서 고타바야의 손을 들어줬다. 적어도 스리랑카 국내에서 그의 대선 출마 자격과 관련, 국적이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은 매우 낮아졌다.
그러나 미국 법원 고발 건은 좀 다르다. CJA는 “고타바야가 미국 시민권을 반납했다 해도, 그 시점은 (기자 암살 관련) 소송 제기 이후였고, 미국 법원은 과거 시민권자였던 인물에 대한 사법 관할권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고타바야의 변호를 맡은 미국 로펌 ‘아놀드 앤 포터’는 그가 대선 당선 시 ‘국가원수로서의 절대적 면책특권’을 갖게 될 것이라며 미 법원에 계류된 소송 두 건을 모두 기각 또는 각하해 달라는 요구서를 제출했다. 고타바야로선 이번 대선에서 반드시 이겨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셈이다.
한편, 고타바야 국적 회복 과정에 문제를 제기했던 시민운동가 두 명은 현재 고타바야 지지자들의 악플과 협박에 시달리고 있는 상태다. “화이트밴을 보내겠다”는 위협도 이어지고 있다. BBC방송 싱할라어 서비스는 이달 6일 ‘테뉴와라 교수와 비얀고다에 대한 소셜미디어의 화이트밴 협박’이라는 제목의 뉴스를 보도하기도 했다. 급기야는 지난 14일 스리랑카의 시민단체 21곳과 지식인 165명은 공동성명을 발표해 두 사람에 대한 ‘화이트밴 협박’을 비난하고 나섰다. 성명에서 이들은 “두 사람의 신변 보호를 위해 경호 인력을 지원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가장 공포스러운 시대를 주물렀던 권력가가 다시 유력 대선 후보의 행보를 보이는 지금, 스리랑카 시민사회에 조금씩 되살아나는 ‘화이트밴 부활’ 공포가 단지 엄살만은 아닐 것이다.
이유경 국제분쟁전문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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