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핵화 반대급부로 ‘맞춤형 카드’… 김정은 최대 역점 사업
北 ‘제재완화 없는 약속에 불과’ 판단에 협상 결렬 선언한 듯
미국이 지난 5일(현지시간) 스톡홀름 북미 실무협상 당시 북한 측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세계적 관광지’로 개발할 생각인 동해안 ‘원산ㆍ갈마 해안관광지구(이하 갈마 지구)’의 중장기 개발 계획과 청사진을 제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 측이 김 위원장 구미에 맞는 맞춤형 카드를 제안하며 협상에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북미 협상 사정을 잘 아는 고위 외교 소식통은 18일 “미국 실무협상단 내 여러 팀에서 협상에 앞서 북한에 대한 경제 지원 방안을 준비해왔고, 실제 미국이 스톡홀름 협상에서 갈마 지구 개발 계획안을 비핵화 반대급부로 북한에 제시했다고 들었다”고 밝혔다. ‘베트남식 경제 개발 모델’ 같은 표현으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나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북한의 ‘밝은 미래’를 언급한 적은 있지만, 협상 과정에서 특정 지역이 구체적으로 거명된 사실이 알려진 건 처음이다.
갈마 지구 개발은 동해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불리는 갈마 반도(강원 원산 시내에서 4㎞ 거리)에 호텔과 놀이시설 등이 포함된 리조트 단지를 조성하는 사업이다. 지난해 신년사에서 “최단 기간 내 완공”을 주문하고 수 차례 현지지도를 하는 등 김 위원장이 가장 신경 쓰는 최대 역점 사업 중 하나로 꼽힌다. 대북 제재 장기화 국면에서 외화 벌이에 활용해보겠다는 심산이다. 공사에 동원된 인원이 군인 12만명과 주민 2만명에 이른다는 추정까지 제기됐다.
하지만 완공 시점은 올해 4월 15일(태양절ㆍ김일성 주석 생일)에서 10월 10일(노동당 창건 기념일)로, 다시 내년 태양절로 자꾸 미뤄져왔다. 건설에 필요한 중장비와 내부를 꾸밀 물자의 부족의 영향이 특히 크다는 게 정보당국의 분석이다. ‘비핵화에 나설 경우 우리가 원산을 개발해주겠다’는 당근을 미국이 제시한 건 이런 곤궁한 형편을 이용해보려는 계산이었을 공산이 크다.
그러나 결과는 북한의 협상 결렬 선언이었다. 무엇보다 기존 계산법을 답습했다고 북한이 판단하도록 만든 게 가장 큰 미국의 패인이라는 게 전문가들 얘기다. 대북 투자 등 경제적 지원이 가능하려면 제도 개선을 포함한 개방 여건 조성이나 인원ㆍ물자의 북한 반입을 제한하는 제재의 완화 등이 선행돼야 하는데 이는 결국 북한이 질색하는 선(先)비핵화가 전제이고, 때문에 결과가 불투명한 ‘먼 미래 약속’에 불과하다고 북한이 여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협상 재개 전후 메시지들을 보면 일관되게 북한이 바라는 건 ‘약속’보다 ‘행동’이다. 지난해 6ㆍ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이후 북한은 줄곧 신뢰가 먼저 구축돼야 본격 비핵화 논의에 들어갈 수 있다는 ‘2단계론’을 고수해왔는데, 첫 단계인 신뢰 조성은 북미가 약속을 이행해야 가능해진다. 자기들은 싱가포르 합의에 따라 핵ㆍ미사일 모라토리엄(시험 중단), 풍계리 핵 시험장 폐기 등 조치를 취했는데 미국은 한미 연합 군사연습 중단, 미군 전략 자산(무기) 한반도 반입 중지 등 당시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는 게 북한의 불만이다.
양측이 원하는 협상 프레임도 다르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미국이 이번에도 ‘의무 대 보상(경제 지원)’이라는 기존 구도에서 협상하려 했지만, ‘의무(북한의 비핵화) 대 의무(미국의 상응 조치)’가 돼야 공정하다는 게 북한 생각”이라고 말했다. 다른 소식통은 “미국이 꺼내든 석탄ㆍ섬유 금수(禁輸) 제재 유예 카드도 영변 핵 시설 폐기와 핵 동결(핵 시설 가동과 핵 물질 생산 전면 중단)이라는 비핵화 초기 조치와 바꾸기에는 상대적 가치가 떨어진다고 북한이 반응한 것으로 안다”며 “‘경제 개발은 알아서 할 테니 너희(미국)는 생존권과 발전권을 저해하는 대북 적대시 정책이나 철회하라’는 게 북한 입장”이라고 했다.
전향 조짐은 일단 미국 쪽에서 보인다. “문제를 풀어가면서 그들(북한)의 안보 이익을 고려하겠다”는 데이비드 스틸웰 미 국무부 동아시아ㆍ태평양 담당 차관보의 16일 상원 청문회 발언은 유화 손짓으로 해석 가능하다. 그러나 북한을 다시 협상 테이블로 견인할 수 있느냐의 관건은 제안의 구체성이라는 게 외교가 중론이다.
박준석 기자 pj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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