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교통사고·영리적 불법행위 등에 징벌적 손배 반영했지만
산재 위자료 현실화엔 유독 소극적… 법조계 “새로운 기준 책정 필요”
선진국에 비해 턱없이 낮은 기준에 사고 기업 합의금 낮추는 빌미로
지난해 인천 한 주물공장에서 일하던 28세 미얀마 청년 K씨는 갑자기 무너진 500㎏ 가량의 주형틀에 깔려 목숨을 잃었다. 뜨거운 쇳물을 식히기 위해 주형틀 4개를 2.8m 높이로 쌓아 올린 뒤 주변 정리를 하다 벌어진 사고였다. K씨 가족이 공장주를 상대로 위자료 청구소송을 냈지만 법원이 인정한 금액은 6,000만원. K씨 가족은 “가족들이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항변했지만, 법원에서 인정하고 있는 기준표에서 산재 사망의 경우 위자료를 1억원으로 제한하고 있어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법원이 산업현장의 사망 사고에 비현실적인 위자료 기준을 적용하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법조계에 따르면 교통사고ㆍ산업재해 등으로 사망할 경우 위자료 지급의 상한선은 1억원. 2015년 서울중앙지법 소속 민사법관들이 기준을 정한 뒤 전국 재판부가 실무상 참고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그나마 1991년 3,000만원, 1999년 5,000만원, 2008년 8,000만원, 2015년 1억원으로 거듭 증액한 결과다. 하지만 이 역시 프랑스 3억원, 독일 8억원, 미국 70억원 등 선진국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기준에서 사고 원인은 큰 의미가 없다. 과실 사고와 사업주 안전의무 위반 사건에서 동일한 기준이 적용되고 있다. K씨의 경우에도 1심 재판부는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를 인정해 공장주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남편이 사업주의 잘못으로 고통 속에 죽었다”는 이유로 낸 1억2,000만원의 위자료 청구 소송에서 법원 기준을 적용해 “6,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화해권고를 결정했다.
법원이 다른 사고의 위자료는 현실화하면서 유독 산재에 대해서만 인색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실제 전국 5개 지방법원 소속 법관들은 2016년 10월 △교통사고 △대형재난사고 △영리적 불법행위 △명예훼손 등 4가지 불법행위 유형에 대해 각각 5,000만원~3억원의 위자료 기준금액을 정하고, 가해자의 잘못이 큰 경우 각각 1억원~6억원을 가중하는 위자료 산정방안을 발표했다. 가해자의 불법행위 여부, 이익 규모, 안전의무 위반 여부 등을 기준으로 제시해 사실상 ‘징벌적 손해배상’ 개념을 반영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정작 산업재해 위자료 기준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에 따라 법조계를 중심으로 산업재해 위자료 기준을 새로 책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고 있다. K씨 유가족을 대리한 최정규 변호사는 “차량 운전자의 과실로 인해 발생한 사고와 사업주의 안전배려의무 위반으로 벌어진 사건은 구별해야 한다”면서 “징벌적 성격을 반영해 산업재해 위자료 기준을 따로 책정하자”고 주장했다.
문제는 법원의 소극적 태도다. 서울중앙지법은 최근 이철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질의에 “인신사고 위자료는 신체 훼손의 정도와 상관관계가 높다”면서 “산업재해에 대한 일률적인 기준을 따로 설정하긴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이철희 의원은 “산업재해 위자료 기준액 산정에 징벌적 성격이 반영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반석 기자 banseok@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