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군의 전격적인 시리아 북동부 침공으로 시작된 ‘쿠르드족 사태’가 사실상 종료됐다. 22일(현지시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정상 간 담판을 통해 무력 공방을 끝내기로 합의하면서 전면전 위기는 간신히 넘겼다. 결과는 터키의 경우 그토록 바랐던 ‘안전지대’ 설치를 관철시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얻었고, 러시아도 미군이 떠난 빈자리를 꿰차며 확실한 중동 교두보를 마련했다. 반면 쿠르드족의 독립 꿈은 이번에도 물거품이 됐다. 미군이 철수한지 불과 16일 만에 벌어진 일이다. 미 CNN방송은 “승자와 패자의 명암이 뚜렷이 갈린 분쟁”으로 평가했다. 패자는 물론 지역의 영향력을 잃어버린 미국을 의미한다.
푸틴 대통령과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날 러시아 소치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시리아 북동부 문제 해결에 합의했다. ‘터키-시리아 국경에 안전지대를 조성한다’는 게 합의문(10개항)의 핵심이다. 합의에 따라 쿠르드족의 군사조직 쿠르드민병대(YPG)는 23일부터 150시간 안에 양측 국경 30㎞ 밖으로 철수해야 한다. 터키가 시리아 쿠르드족 격퇴 명분으로 내세운 안전지대 설치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주목할 부분은 5ㆍ6항이다. 러시아와 터키는 ‘YPG 설비ㆍ무기를 함께 제거한다’는 데도 의견을 같이 했다. 터키는 그간 YPG를 테러세력으로 지목한 쿠르드노동자당(PKK)의 분파 조직이라고 주장했는데, 러시아도 터키 입장에 동조했다는 뜻이다.
터키 관영 아나돌루통신이 ‘역사적 합의’라고 명명한 데서 보듯, 터키 정부에는 이보다 좋을 수 없는 결과이다. 미국의 침묵 아래 러시아의 지지까지 이끌어 내면서 터키는 명분 없는 군사행동이라는 국제사회의 비난도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이번 사태의 진정한 승자는 러시아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미국의 퇴장과 러시아의 부상으로 2주 만에 시리아 역학구도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푸틴과 에르도안은 합의문에 “양국군이 카미실리를 제외한 터키 ‘평화의 샘’ 작전 구역 동서방향으로 폭 10㎞ 구간을 합동 순찰하겠다”고 명시했다. 이슬람국가(IS) 축출 전까지 중동지역에 변변한 거점 하나 없던 러시아가 일약 존재감을 과시하며 시리아에 무혈 입성하게 된 것이다. 영국 BBC방송은 “중동의 외톨이에서 최대 중재자로 힘을 키웠다”면서 달라진 푸틴의 위상을 확인했다.
나라 없는 쿠르드족의 슬픈 역사는 반복됐다. 1만명을 희생해 IS를 시리아에서 몰아내는 데 앞장서고도 미국에 뒤통수를 맞아 독립국 예비 터전에서 밀려날 운명에 처했다. 러시아의 개입으로 터키의 군사적 위협을 피할 보증인 정도가 생겼을 뿐이다. 유엔은 이날 “터키 침공 기간 17만6,000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했고 이 중 8만명은 어린이”라고 밝혔다. 이미 7,000명 넘는 난민이 이라크 쿠르드자치지역으로 피란을 갔다는 현지 매체 보도도 나왔다.
미국이 가장 큰 패배자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이날 합의로 에르도안과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이 17일 맺은 조건부 휴전안은 휴짓조각이 돼 버렸다. CNN은 “미군의 빠른 철수가 푸틴에게 큰 선물을 안겼다”며 철군 결정을 비판했다.
김이삭 기자 hir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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