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세계무역기구(WTO) 내 개발도상국 지위를 내려놓기로 방침을 정하면서 농업계와의 갈등이 본격화될 조짐이다. 정부로선 최대한 당근을 제시하며 농심을 달래야 할 상황이지만, 농업계가 1차로 제시한 요구 사항과도 정부 입장은 간극이 크다.
23일 농업계에 따르면 한국농축산연합회, 한국농업인단체연합 등 농축산 단체는 전날 열린 민관합동 농업계 간담회에 앞서 △공익형 직불제 도입 △안정적인 농업 재정지원 △인력 지원 방안 △소득 보장 방안 △수요 확대 및 경영 안정화 방안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한 특별위원회 설치 등 6개 요구사항을 정부에 전달했다. 구체적으로는 △전체 예산 중 농업예산 비중 4% 이상으로 확대 △농어촌상생협력기금 활성화 △농지은행 사업 활성화 △한국농수산대 정원 확대 등을 내세운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는 24일 농민단체와 추가 간담회를 갖는다는 방침이지만, 요구사항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우선 내년도 농림축산식품부 예산ㆍ기금안 총지출 규모는 15조2,990억원으로 전체 예산(513조5,000억원)의 2.98% 수준이다. 이를 전체 예산의 4%(20조5,400억원)로 끌어올리려면 현 농업예산 규모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5조2,410억원을 증액해야 한다는 뜻이다. 최근 5년 간 농업예산 증가율은 연평균 1.5%에 불과했던만큼 현실성이 낮아 보인다. 다만 한 농민단체 관계자는 “구체적인 금액을 약속하라는 것보다, 농업에 대한 정부의 지원 의지를 보여달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농어촌상생협력기금 활성화도 정부 역할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해당 기금은 지난 2015년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국회 비준 당시 피해를 볼 우려가 있는 농어업인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됐다. 민간기업과 공기업, 농ㆍ수협이 2017년부터 매년 1,000억원씩 10년에 걸쳐 기부금 총 1조원을 출연해 농어촌 자녀장학사업, 농수산물 상품권 사업 등에 사용하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지난 3년 간 모인 금액은 목표액 3,000억원의 21%인 643억원에 불과했다. 기금 출연도 대부분 공기업이 담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공익형 직불제 도입은 정부가 적극 추진 의지를 갖고 있지만 국회에 막혀 있다. 공익형 직불제는 기존 쌀 직불과 밭 직불을 통합해 작물ㆍ가격에 상관없이 면적당 일정액을 지급하는 개념이다. 관련 법안은 지난해 11월 발의됐지만 국회 공전으로 논의가 진척되지 못하고 있다. 농민단체 관계자는 “여야 모두 공익형 직불제 도입에 공감하고 있지만 금액 차이가 큰 데다, 문재인 대통령의 핵심 공약이라는 점에서 정치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농업단체들은 “대책 없이는 대화도 없다”는 입장이어서, 갈등은 장기화될 가능성도 높다. 전날 간담회는 비공개 진행과 대책 부재에 대한 농민들의 반발 속에 파행으로 끝났다. 김용범 기획재정부 1차관은 회의 후 “(농업인 단체 요구 사업은) 단기간에 확정적으로 정부 입장을 말하기엔 부처 간 조율과 논의가 필요한 사항”이라며 정부 차원에서 논의해보겠다고 말했다.
세종=손영하 기자 froze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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