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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시선, 워코노미] 경제학 관점서 최대 효용 용병, 피사에겐 ‘독이 든 성배’

입력
2019.10.26 04:00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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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피사-피렌체 전쟁 

※ 태평양전쟁에서 경제력이 5배 큰 미국과 대적한 일본의 패전은 당연한 결과로 보입니다. 하지만 미국과 베트남 전쟁처럼 경제력 비교가 의미를 잃는 전쟁도 분명히 있죠. 경제 그 이상을 통섭하며 인류사의 주요 전쟁을 살피려 합니다. 공학, 수학, 경영학을 깊이 공부했고 40년 넘게 전쟁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온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가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 연재합니다.

피사는 해상무역로 확보를 위해 1363~64년 피렌체와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백년전쟁 휴전 이후 일거리를 찾아다니던 용병단 중 ‘백색단’을 고용했다. ‘자유단’으로도 불린 이들 용병단 중엔 브히녜전투(1362)에서 프랑스 정규군을 격파하며 유명세를 떨친 무리도 있었다. 프랑스 궁정작가 장 프루아사르(1337~1405)의 백년전쟁 기록인 ‘프루아사르 연대기’ 중 브히녜전투를 묘사한 삽화다. ⓒ위키피디아
피사는 해상무역로 확보를 위해 1363~64년 피렌체와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백년전쟁 휴전 이후 일거리를 찾아다니던 용병단 중 ‘백색단’을 고용했다. ‘자유단’으로도 불린 이들 용병단 중엔 브히녜전투(1362)에서 프랑스 정규군을 격파하며 유명세를 떨친 무리도 있었다. 프랑스 궁정작가 장 프루아사르(1337~1405)의 백년전쟁 기록인 ‘프루아사르 연대기’ 중 브히녜전투를 묘사한 삽화다. ⓒ위키피디아

1363년 말 피사는 오랜 라이벌 피렌체를 굴복시킬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피사군을 이끄는 조반니 아쿠토 때문이었다. 그는 약삭빠르고 교활한 군인으로 명성이 높았다.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를 지나는 아르노강 하구에 위치한 덕분에 피사는 12세기에 무역 중심지로서 힘을 얻었다. 피사는 강력한 함대에 힘입어 중동과 북아프리카 등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해양공화국으로서 최전성기의 피사는 베네치아 및 제노바와 자웅을 겨뤘다. 특히 아드리아해의 맹주 베네치아보다는 리구리아해와 티레니아해를 공유하는 제노바와 치열하게 경쟁했다. 1284년 멜로리아섬해전에서 갤리 72척의 피사해군은 88척의 제노바해군에게 함대의 반과 귀중한 5,000명 선원의 목숨을 잃었다. 바다로 나갈 길이 막힌 피사는 이제 토스카나 서쪽 내륙의 피렌체와 대결을 벌이게 됐다.

 ◇병력 열세 피사의 고육책은 

무역이 급감한 해상국가 피사가 내륙에 탄탄한 기반을 가진 피렌체와 육전에서 승리하기는 쉽지 않았다. 1315년 몬테카티니전투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나폴리와 피렌체의 연합군을 물리치기도 했지만 일회성 승리에 가까웠다. 1348년 흑사병이 이탈리아 전역을 덮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발병 전 4만 명 수준이었던 피사의 인구는 약 2만5,000명으로 줄었다. 9만 명에서 4만5,000명으로 감소한 피렌체의 피해가 더 컸지만 동원 가능한 병력의 절대수란 면에서 피사는 위태로웠다.

피사는 돈으로 군대를 사는 결정을 내렸다. 쉽게 말해 용병을 고용해 전쟁을 벌이자는 생각이었다. 1337년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백년전쟁이 시작되면서 전투가 직업인 사람들이 유럽 각지에서 모여들었다. 20년 넘게 계속된 파괴와 약탈의 피로감이 커지자 양국은 1360년 브레티니조약을 맺고 휴전했다. 할 일이 없어진 군인들은 떼로 몰려 다니며 일거리를 찾았다. 피사는 그 중 ‘화이트 컴퍼니’, 즉 백색단을 고용했다. 이들이 갑옷 위에 입는 덧옷이 하얀색이라 붙은 이름이었다. 오늘날 회사로 번역되는 영어 컴퍼니(company)는 원래 ‘빵을 같이 먹는 무리’, 곧 당시의 무장단체를 지칭했다. 현대의 이른바 민간군사회사(PMC)는 백색단과 같은 용병회사의 직계 후손이다.

백색단은 그러한 용병단 중 하나였다. 프랑스 동부에서 비롯된 이들은 샹파뉴와 부르고뉴를 거쳐 1360년 겨울 퐁생테스프리에 진지를 폈다. 근방의 아비뇽에 있던 교황 인노첸트 6세는 약탈을 중지하라고 명했다. 파문이 두려웠던 용병 무리는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두 곳에서 교황을 위해 싸우기로 계약을 맺었다. 이탈리아로 들어간 백색단은 1362년 몽페라트후작을 위해 사보이를 공격해 승리했다. 이어 1363년 4월 칸투리노전투에서 이름난 콘도티에로(condottiero) 콘라드 폰 란다우가 이끄는 ‘그레이트 컴퍼니’를 이겼다. 이탈리아말로 콘도타(condotta)는 ‘계약’을, 콘도타에서 파생된 콘도티에로는 ‘계약을 맺는 자’를 의미했다. 즉 콘도티에로는 용병회사의 대표였다.

 ◇경제학 관점에서 본 용병 고용 

경제학의 관점으로 보면 용병 고용은 합리적인 행위다. 첫째로 용병은 징병에 비해 사회의 자원을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강제로 징집된 애송이보다 오랜 실전으로 단련된 용병의 개별 전투력이 높으리란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즉 용병은 적성과 학습을 통해 전투에 최적화된 노동력으로서 분업 혹은 무역의 비교우위와 맥을 같이 한다. 둘째로 지불한 돈에 비해 얻는 효용이 크다면 용병 채용은 정당하다고 경제학은 주장한다. 발생한 거래는 시장을 증명하며 시장은 효용의 최대화를 담보하는 기구다.

용병들은 조국도 없고 주인도 없었다. 말하자면 자유로운 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자유단’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물론 이들의 자유는 돈으로 매수 가능한 상품화된 자유였다. 누구든 돈만 내면 이들의 창을 부릴 수 있었다. 말하자면 용병회사는 그저 돈 주는 사람의 뜻을 따르는 청부업자였다.

자유단에게 전투는 철저히 비즈니스였다. 용병이 바라는 일은 딱 두 가지였다. 첫째, 전쟁이 끝나지 않고 계속되기를 원했다. 그래야 계속해서 돈을 벌 수 있었다. 둘째, 위험한 일은 피해야 했다. 진짜로 싸우다가 죽기라도 하면 그보다 큰 손해는 없었다. 무장하지 않은 시민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다가도 상대방 용병을 만나면 서로 싸우는 시늉만 했다. 용병의 행태를 한평생 지켜본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용병은 아군과 함께 있을 때는 용감하지만 적과 마주치면 비겁해진다”고 썼다. 콘도티에로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은 ‘이탈리아의 스커지(scourgeㆍ재액)’이었다.

 ◇80억원 들여 빌린 ‘전투력’ 

칸투리노전투 후 피사는 백색단에게 접근했다. 피사군의 일부가 되어 피사의 방어와 피렌체에 대한 공격을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백색단의 콘도티에로 알베르트 슈터츠는 6개월의 계약기간에 4만 플로린을 받기로 피사와 계약했다. 13세기부터 16세기 초까지 사용된 금화 단위인 1플로린은 명목상 0.1125트로이온스로 현재 가격으로 환산하면 20만 원 정도였다. 즉 백색단을 고용하는 데 피사는 80억 원의 돈을 들였다.

피사와 계약을 맺은 후 슈터츠가 한 첫 번째 일은 전투가 아니었다. 슈터츠는 피렌체로 전령을 보냈다. 3만 플로린을 주면 6개월간 피렌체를 위해 피사를 공격하겠다는 제안이었다. 피사와 계약한 금액보다 1만 플로린이 적은 금액이었지만 슈터츠는 다른 속셈이 있었다. 피사와 맺은 용병계약의 선금으로 1만4,500플로린을 이미 받은 뒤였다. 즉 피렌체가 승낙하면 피사로부터 받은 선금을 떼먹을 심산이었다. 피렌체는 슈터츠의 제안을 거절했다.

1363년 7월, 백색단은 피렌체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주된 공격 대상은 피렌체 주변의 농경지였다. 백색단은 작물을 망가트리고 밭에 불을 놓았다. 피렌체를 굶기려는 표면상의 이유 외에도 위험한 전투를 회피하려는 이유도 상당했다. 백색단이 대결을 미루고 약탈만 일삼자 피렌체군은 성을 나서 일전을 벌였다. 인치사에서 벌인 야전에서 백색단은 피렌체군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가했다. 피렌체는 500명의 기사와 1,000기 이상의 말을 잃었다.

백색단이 피렌체 서쪽 10㎞ 지점에 진을 치자 피사는 승리가 멀지 않았다고 기뻐했다. 피사의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백색단은 약해진 피렌체를 공격해 점령하기보다는 피사를 욕망의 배설구로 쓰는 데 더 많은 힘을 쏟았다. 백색단원의 행태는 우군이 아닌 점령군에 가까웠다. 피사인들은 자신의 아내와 딸들을 제노바 등으로 피신시켰다.

 ◇피렌체, 용병 매수로 역공하다 

1363년 12월, 수익배분에 불만이 많았던 백색단원들은 슈터츠를 끌어 내리고 영국인 존 호크우드를 새로운 콘도티에로로 선출했다. 이탈리아인들은 호크우드를 조반니 아쿠토라고 불렀다. 호크우드는 1364년 1월 피사와 새로운 6개월짜리 계약을 맺었다. 지난 인치사전투의 성과를 들먹이는 호크우드의 협상력은 높았다. 이번 계약금은 15만 플로린, 즉 300억 원이었다.

1364년 2월2일, 호크우드는 백색단-피사군을 이끌고 피렌체 공격에 나섰다. 이탈리아에서 겨울 전투는 낯선 개념이었다. 그럼에도 네 배 가까이 인상된 금액으로 계약을 맺은 만큼 호크우드는 고용주인 피사에게 뭔가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어이없게도 호크우드의 부대는 피스토이아에서 성난 농부들의 공격을 받고 혼쭐이 났다. 3,500명 병력의 백색단 전투력에 의문을 갖게 된 피사는 하네켄 폰 바움가르텐이 이끄는 3,000명의 독일 및 스위스용병단과 새로 계약을 맺었다.

용병을 돈으로 사는 일은 피사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여러 용병단으로 구성된 피사군이 5월1일, 피렌체 성벽까지 들이닥치자 피렌체는 피사를 따라 했다. 먼저 바움가르텐의 용병단을 4만4,000플로린에 매수했다. 바움가르텐이 9,000플로린을 갖고 나머지 3만5,000플로린을 용병들이 나눠가졌다. 이어 슈터츠 이하 백색단의 대부분을 10만 플로린에 매수했다.

이제 이들 모두는 창 끝을 돌려 피사 공격의 선봉에 섰다. 호크우드에게 남은 병력은 800명의 백색단 잔존 병력과 4,000명의 피사군 보병이 전부였다. 7월28일, 카시나전투에서 호크우드는 남은 백병단의 피해가 커질 듯하자 도망쳤다. 소년과 노인까지 동원된 피사군 보병은 1,000명 이상 죽고 2,000명 이상 포로로 잡혔다. 1364년 9월, 피사는 피렌체와 협정을 맺고 10만 플로린을 배상금으로 지불했다. 1406년 10월6일, 피사는 결국 피렌체군에 의해 함락됐다.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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