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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유목민이야… 떠나는 자들에게 축복 있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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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유목민이야… 떠나는 자들에게 축복 있으리니”

입력
2019.10.25 04:4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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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카르추크는 소설을 가리켜 “국경과 언어, 문화의 장벽을 뛰어넘는 심오한 소통과 공감의 수단”이라고 말했다. ‘방랑자들’은 이러한 작가의 지향이 담긴 대표적 작품이다. AFP 연합뉴스
토카르추크는 소설을 가리켜 “국경과 언어, 문화의 장벽을 뛰어넘는 심오한 소통과 공감의 수단”이라고 말했다. ‘방랑자들’은 이러한 작가의 지향이 담긴 대표적 작품이다. AFP 연합뉴스

‘호모 노마드(homo-nomad)’, 유목하는 인간. 프랑스의 지성 자크 아탈리는 인류 5,000년 문명은 정착민이 아닌 유목민이 건설했다고 봤다. 인류 최초의 조상은 나무에서 내려와 유랑 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21세기는 바로 이 ‘유목민적 가치관’을 가진 인간들이 대거 출현하게 되어 있다고 전망했다. 그리하여 유목민적 행위와 삶을 뜻하는 ‘노마디즘(Nomadism)’이 인류 역사의 근간을 이뤄 왔을 뿐만 아니라, 미래 사회를 개척하는 패러다임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올가 토카르추크의 장편소설 ‘방랑자들’은 바로 이 호모 노마드로서의 인류를 문학적으로 승화시켜 한 권에 집약한 책이다. 지난 10일 발표한 2018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토카르추크의 대표작이자, 2018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작, 폴란드 최고 권위 문학상인 니케 문학상 수상작이다. 노벨문학상을 선정하는 스웨덴 한림원은 “삶의 한 형태로서 경계를 넘어서는 과정을 해박한 열정으로 그려낸 서사적 상상력”이라고 평했다. 이 평가처럼 ‘방랑자들’은 인류의 삶과 죽음을 방랑이라는 주제 하에 하나로 엮어낸 역작이자, 지금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이름이 된 작가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작품이다.

‘장편소설’로 분류되지만, 엄밀히 따지면 116개의 삽화로 이뤄진 책이다. 서사적 완결성을 지닌 단편들부터, 휘갈긴 메모에 가까운 짧은 글까지 분량도 제각각이다. 여행일지나 르포르타주, 서간문이나 강연록 형식의 글 등 장르도 어느 것 하나로 귀결되지 않는다. 소설 속 인물들이 처한 상황과 에피소드도 마찬가지다. 크로아티아 여행 중 사라진 아내와 아이를 애타게 찾는 폴란드인 남성의 여정, 30년 전 만난 연인으로부터 죽어간다는 이메일을 받고 그를 만나러 가는 생물학자, 프랑스에서 사망한 쇼팽의 심장을 몰래 숨긴 채 모국인 폴란드로 돌아온 쇼팽의 누이 등, 어딘가로부터 떠나 무엇인가로 향하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소설 속 인물들은 고정된 자아가 아니라 “장소나 시각, 언어나 도시, 기후에 따라 자신의 현존이 좌우되는 존재”다.

올가 토카르추크가 지난해 맨부커상을 수상한 후 자신의 작품 ‘플라이츠(Flights)’와 트로피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올가 토카르추크가 지난해 맨부커상을 수상한 후 자신의 작품 ‘플라이츠(Flights)’와 트로피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방랑 중에 잠시 머무르는 공간, 마주치는 사물들도 모두 이야기의 소재다. 예컨대 공항은 “비행기 엔진의 교향곡, 리듬을 거세한 채 공간을 가득 메우는 몇 개의 단순한 음들, 두 개의 엔진이 만들어 내는 전형적인 화음, 암적색과 암흑색의 음울한 단조, 비행기가 이륙할 때 강렬한 입당송으로 시작되다가 착륙하며 ‘아멘’으로 마무리되는 레퀴엠”이 울려 퍼지는 곳이다. 인간의 신체 역시 방랑의 주요 무대다. 소설에는 17세기부터 21세기에 걸쳐 신체를 방부 보존하기 위해 골몰했던 해부학자들이 등장한다. 유리병에 보존된 신체는 과거 한 순간에 존재했다가 지금은 사라진 인류의 흔적을 나타내고, 이는 방랑하는 인간의 유구한 역사를 증명한다. 이외에도 여행용 화장품 키트를 파는 드러그 스토어, 여행 안내서, 박물관의 전시품까지 여행과 관련된 모든 진부한 사물들이 작가의 손끝에서 새로운 주석을 달고 다시 태어난다.

토카르추크가 첫 해외 여행을 떠난 것은 1989년 폴란드의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고 국제적 고립이 끝난 이후였다. 작가 나이 28세였다. 1990년 동독을 처음 여행한 후 방랑과 여행에 대한 작가의 기나긴 사색이 시작됐다. 유럽과 아시아 국가들을 여행하는 동안 작가는 꾸준하게 여행 일지를 썼지만, 여행에 관한 회고록을 작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작가는 “나는 우리가 더 이상 선형적인 방식으로 여행하지 않고, 오히려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건너 뛰었다가 다시 돌아오는 방식으로 여행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따라서 서로 별개이지만 심리적, 신체적, 정치적 수준에서 서로 연결될 수 있는 ‘별자리’ 소설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소설은 결국 우리의 인생이 서로 별개이지만 서로 연결되는 기나긴 여행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토카르추크만의 긴 잠언록인지도 모르겠다. “멈추는 자는 화석이 될 거야, 정지하는 자는 곤충처럼 박제 될 거야, (…) 움직여, 계속 가, 떠나는 자에게 축복이 있으리니.”

방랑자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ㆍ최성은 옮김

민음사 발행ㆍ620쪽ㆍ1만 6,000원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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