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O 개도국 지위 포기, 결정적 이유들
정부가 25일 세계무역기구(WTO) 개발도상국 지위를 공식적으로 내려놨다. 표면적으로는 WTO 미래 농업분야 협상 시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WTO 내에서 개도국 지위를 사실상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결정 배경을 보면 ‘우리는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고, 우리와 비슷하거나 못한 나라도 포기한 마당에, 당분간 실질적인 피해는 없으니 차기 협상까지 대응할 시간은 충분하다’는 걸로 요약된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날 정부서울청사에서 대외경제장관회의를 주재하면서 “쌀 등 민감품목에 대한 별도 협상 권한을 확인하고, 미래협상에 한해 특혜를 주장하지 않는다(not seek)는 점을 명확하게 했다”고 밝혔다.
우리나라는 지난 1995년 WTO 출범 시 개도국 특혜를 인정받은 이후 1996년 국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계기로 농업과 기후변화 분야에서만 개도국 특혜를 유지하기로 한 뒤 현재까지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WTO 개도국으로 우리나라는 그간 농산물 관련 수입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할 수 있고, 국내 농업분야에 보조금을 지급할 수 있었다. 또 회원국들이 합의한 관세 인하 폭과 시기 조정 등에서 상대적으로 느슨한 규제를 적용받는 이점을 누려왔다.
그러나 미국을 중심으로 잘 사는 나라들이 개도국 혜택을 과도하게 누린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개도국 특혜 문제가 이슈로 떠올랐고, 결국 우리 정부는 다각적인 계산 끝에 특혜를 사실상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정부는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기로 한 배경으로 △우리나라의 대외적 위상 △비슷한 위상 국가들의 잇단 포기 △차기 협상 체결까지 특혜 유지 등을 제시했다. 홍 부총리는 “WTO 가입 이후 약 25년이 지난 지금 우리 경제는 국내총생산(GDP) 규모 세계 12위, 수출 세계 6위, 국민소득 3만달러 등 이미 선진국 반열에 오를 정도로 발전했다”며 “경제적 위상을 감안했을 때 우리가 국제사회에서 개도국으로 더 이상 인정받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의 경제 규모ㆍ위상과 비슷하거나 낮은 싱가포르, 브라질, 대만 등이 향후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상황에서 우리나라만 특혜를 주장할 경우 이를 인정해줄 가능성이 없다는 판단도 포기 결정의 주요 이유다. 홍 부총리는 “개도국 특혜에 관한 결정을 미룬다 하더라도 향후 WTO 협상에서 우리에게 개도국 특혜를 줄 가능성이 없는데, 결정이 늦어질수록 대외적 명분과 협상력을 모두 잃을 수 있다”고 밝혔다.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더라도 당장 특혜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더라도 이는 미래 WTO 협상부터 적용되고 그때까지 기존 특혜는 변동 없이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농업분야를 포함한 WTO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은 회원국별 입장 차로 10여년 넘게 중단된 상태여서 언제 새로운 협상이 시작돼 체결까지 이어질지도 현재로서는 미지수다. 정부로서는 개도국 지위 졸업을 선언해도 선언적 의미 외에 당분간 불이익은 전혀 없다고 본 셈이다. 홍 부총리는 “향후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기로 결정하더라도 당장 농업분야에 미치는 영향은 없으며, 미래 협상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영향에 대해 대비할 시간과 여력은 충분하다”고 말했다.
세종=이대혁 기자 selected@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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