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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칼럼] 혐오, 무식과 겁의 표현

입력
2019.10.29 18:0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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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의 생각이 모두 같지는 않다. 영화가 개봉 5일 만에 관람객 100만 명을 돌파했다는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면 앞이 캄캄해진다. ‘혐오’ 그 이상의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혐오의 근거는 무식이다. 모르면 겁나고 겁나면 혐오한다. 영화 ‘82년생 김지영’ 스틸 이미지.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세상 사람의 생각이 모두 같지는 않다. 영화가 개봉 5일 만에 관람객 100만 명을 돌파했다는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면 앞이 캄캄해진다. ‘혐오’ 그 이상의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혐오의 근거는 무식이다. 모르면 겁나고 겁나면 혐오한다. 영화 ‘82년생 김지영’ 스틸 이미지.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82년생 김지영’이 소설에 이어 영화로도 대성공을 거두고 있다. 92년생과 01년생 두 딸을 둔 63년생 대한민국 남자로서 기쁜 일이다. 그 기쁨의 이면에는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서려 있다. 뭐, 그렇다고 해서 내 행동거지가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다만 적어도 내 딸은 엄마와는 다른 세상에서 살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분명히 커졌다.

세상 사람의 생각이 모두 같지는 않다. 영화가 개봉 5일 만에 관람객 100만 명을 돌파했다는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면 앞이 캄캄해진다. (댓글을 본 내가 잘못이다. 도대체 뭘 기대했단 말인가. 이 칼럼에 대한 댓글도 보지 말아야 한다.) ‘혐오’ 그 이상의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혐오는 우리 일상 곳곳에 숨어 있다. 혐오가 생명을 지키는 강력한 안전망이던 시절이 있었다. 낯선 이를 경계했다. 그가 무슨 질병이 있을지 어떤 흉흉한 속셈이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낯선 냄새와 색깔, 짐승과 의례를 경계했다. 석기시대 이야기다. 혐오의 근거는 무식이다. 모르면 겁나고 겁나면 혐오한다.

이제 우리는 많은 것을 안다. 질병의 원인을 알고 있고 든든한 사회안전망이 있다. 하여 이제 혐오는 더 이상 안전망이 아니라 질병 또는 범죄로 취급된다. 외국인 혐오, 여성 혐오, HIV 환자 혐오, 성소수자 혐오는 무식에서 비롯된 사회적 질병이다. 사회적 질병은 개인이 아니라 사회가 책임지고 고쳐줘야 한다. 적어도 문명사회라면 사회가 그 정도 서비스는 해야 한다.

또 다른 혐오가 있다. 바로 화학에 대한 혐오다. 어느덧 화학은 자연 또는 천연의 반대말이 되었다. 천연 염료는 좋은 것이지만 화학 염료는 환경 파괴의 원인이다. 천연 조미료는 좋은 것이지만 화학 조미료는 건강에 해롭다. 유기농 식품은 좋지만 화학 비료를 사용하면 건강과 환경에 나쁘다. 그리하여 화학은 이 땅에서 없어져야 한다. 이런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우리는 노벨상을 학수고대한다. 노벨상은 알프레드 노벨이 1895년에 작성한 유언에 따라 매년 ‘인류 문명 발달’에 학문적으로 기여한 사람에게 주는 상이다. 그런데 노벨상에는 화학상도 있다. 화학은 인류 문명 발달에 아주 중요한 요소라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는 화학을 혐오한다.

화학 혐오의 배경에는 숫자를 따지지 않는 게으름이 숨어 있다. 2018년 11월부터 몇 달 동안 부모들이 신생아들에게 백신을 맞히지 않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유가 있었다. 백신 주사에서 비소(As)가 발견된 것이다. 비소가 무엇인가. 장희빈이 먹은 사약 속 독이 아니던가. 아니 어찌 사랑스러운 아기에게 비소 주사를 맞출 수 있겠는가. 그런데 한 번쯤 생각해 봤어야 했다. 설마 없던 비소를 새로 추가하기야 했겠는가 말이다. 원래 있었다. 워낙 적은 양이어서 몰랐을 뿐이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다보니 그 적은 양마저 검출한 것이다. 그 양은 우리가 먹는 밥 한 숟갈 안에 들어 있는 양 정도다.

2017년 살충제 달걀 파동도 비슷하다. 달걀 값이 치솟고, 동네 빵집이 문을 닫고, 학교 영양사 선생님들은 달걀 없는 식단을 짜느라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수많은 양계장이 파산하고 파산한 양계장을 살리기 위해 많은 세금이 들어갔다. 피프로닐이라는 ‘보통’ 독성 성분이 달걀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때도 숫자는 무시되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ADI(평생 1일 섭취 허용량)와 ARfD(급성 독성 참고량)이라는 기준을 마련해 두었다. 이들 기준치에 따르면 체중 60㎏의 성인이라면 평생 살충제 달걀을 하루에 5.5개를 먹어도 안전하다. 독성이 몸에서 발휘되려면 하루에 246개를 먹어야 했다. 살충제 달걀이 괜찮다는 말이 아니다. 기준을 넘었으니 정부는 시민에게 알리고 조치를 취하면 된다. 시민마저 패닉에 빠질 필요는 없었다는 말이다. (식약청은 이 사실을 친절하게 국민에게 알릴 의무가 있었다.)

천연 비타민과 화학 비타민은 분자식이 똑같다. 세포는 두 비타민을 구분하지 못한다. 천연 비타민을 먹었다고 해서 세포가 “우리 주인님이 고급진 걸 드셨네. 내가 주인님의 성의에 보답해서 더 튼튼한 세포가 되어야겠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화학 비타민을 먹었다고 해서 세포가 “이게 뭐야. 성의 없게. 나는 삐뚤어질 테야”라고 다짐하지 않는다.

플라스틱 쓰레기 때문에 환경 문제가 심각하다. 플라스틱이 문제가 아니라 숫자를 따지지 않고 무턱대고 사용한 우리가 문제였다. 서울시에서 일회용 커피 잔과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는 정책을 시행하자 정말로 순식간에 플라스틱 쓰레기가 60% 이상 줄었다. 항상 숫자가 중요하다. 날씨만 보고서 미세먼지 농도를 짐작해서는 안 된다. 느낌만 믿지 말고 숫자로 확인하자.

‘82년생 김지영’에 악성 댓글을 달기 전에 ‘82년생 김지영 팩트 체크’라는 단어로 먼저 검색 해보자. 한국 여성의 삶을 숫자로 확인할 수 있다. 화학에 대한 혐오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과학관에 가보자. 많은 과학관에서 ‘주기율표 특별전’을 하고 있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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