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넘어야 할 ‘리틀 고스트’
국내 불체자 절반 이상이 메콩 출신
태국 동북부 시골마을 우돈타니에서 작은 민박집을 하고 있는 A(28ㆍ여)씨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리틀 고스트’였다. 리틀 고스트는 외국에 불법체류하는 태국 노동자들을 칭하는 은어다. 한국 전역의 농장을 전전하며 지난 5월까지 안 해 본 농사일이 없다. 외부와 철저히 격리된 생활, 하루 12시간 이상의 고된 노동으로 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두고 온 어린 아들 생각에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날이 많았다. ‘가야지, 이제 가야지’ 하면서도 160만원가량의 월급을 받는 날이면 약한 마음도 사라졌다.
7년이라는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 귀국한 그를 고향 사람들은 ‘사장님’이라 불렀다. 그런 그를 보고 주변에서 “나도 리틀 고스트의 길을 가겠다”는 사람들이 많지만 선뜻 권하기는 어렵다는 게 A씨의 솔직한 심정이다. A씨는 “한국이 태국과 고용허가제(EPS) 협약을 맺고 있어 4년10개월의 고용을 보장하는 합법 근로의 길이 있지만 낙타 바늘구멍 통과하기나 다름없다”면서 “현실적으로는 리틀 고스트의 길밖에 없지만 악몽과도 같은 시간을 동포들과 공유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불법 체류자(불체자) 문제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신남방시대를 표방한 문재인 정부에서도 여전히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식으로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사고를 당하고도 추방될까 두려워 병원을 찾지 못하고 단속을 피해 도망치다 떨어져 죽기도 하는 처지의 불체자들은 점차 늘어만 가고 있다.
메콩 지역 출신 ‘불체자’ 급증에도 단속만
법무부에 따르면 지난 9월 말 현재 국내 불체자는 약 38만명으로, 이 중 태국과 베트남,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등 메콩 지역 5개국 출신이 21만2,000명으로 56%를 차지한다. 법무부 관계자는 “이 중에서도 태국 불체자 수가 2017년 6만8,449명에서 지난해 그 두 배인 13만8,591명으로 늘었다”며 “이 추세라면 올해엔 20만이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늘어나는 속도에 놀란 법무부가 지난 3월 연 2회 실시하던 정부합동 단속을 연 6회로 확대하는 강경 대응책을 내왔다. 최근에는 ‘최근 3년 평균 실적 기준 10% 상향’이라는 구체적인 목표까지 제시, 불법체류자들에게 선전포고까지 한 상황이다.
그러나 단속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정부만 모르고 있는 듯하다. 시민ㆍ인권 단체들은 불체자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지 못하면 신남방정책은 성공할 수 없다며 정부의 강압적 단속 행태를 한 목소리로 비판하고 있다. 아세안 지역 중 메콩강 지역 출신들이 국내로 가장 많이 유입되는 현상을 정확히 진단하고, 공동화 현상이 심각한 농어촌 고용시장 실태 등 국내의 수요 여건을 냉철히 분석해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국 저출산 고령화 감안한 대책을
국내 노동시장은 이미 불법체류자를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농업과 건설, 단순 반복조립 분야에서 불법체류자가 대체재로 자리잡은 지 오래. 경북 구미시 관계자는 “인근 김천, 칠곡, 성주, 의성, 군위까지 농사일 70% 이상을 동남아 출신 불체자들이 한다”며 “인력공사에 하루 9만5,000원을 주고 데려와 쓰는 게 부담되지만, 그들이라도 없으면 농사가 안 된다”고 말했다. 농촌 지역 외에도 경기와 경남의 영세 부품 생산ㆍ조립 업체들이 밀집한 일부 공단의 경우 상당 비율의 근로자들이 불체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이 없으면 농촌과 공장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강압적 단속만이 대책이 될 수 없다는 지적이다. 도리어 과도한 단속이 메콩 지역 국가들의 반한(反韓) 감정만 부추길 우려도 제기된다. 태국과 미얀마를 오가며 24년째 기업체를 운영 중인 한국인 D(51)씨는 “한국 당국의 고압적 태도 소식이 확산하면서 ‘한국은 우릴 우습게 본다’는 식의 반한 기류도 심상치 않게 감지되고 있다”고 전했다.
태국 유명 여배우인 워라눗 비롬팍디가 2017년 말 인천국제공항에서 겪었던 입국 불허 소동 이후 한국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번지면서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는 진단이다. 한국 내 태국인 불법체류자 문제를 심층 취재한 꼰차녹 락사세리(여) 방콕포스트 기자는 “방문 목적이 분명한 합법적 입국임에도 인천공항 입국심사대를 가슴 졸이며 통과한다는 태국인들이 많다”며 “한국 이미지 개선을 위해서라도 발단인 된 불체자 문제가 해결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림 3우돈타니 지역에서 해외 취업 지원 업무를 맡고 있는 몽콘 타이로씨. 그는 한국 내 태국인 불법체류자 문제 해결을 위해 태국과 이스라엘이 체결한 협정을 참고할 것을 제안했다. 우돈타니(태국)=정재호 기자
체류 기간 연장 등 양성화 통해 자원으로 활용
불체자 ‘공급국가’가 된 태국에서는 단속 위주의 해법이 아닌 양성화 대책을 한국 측에 제시하고 있다. 실제 태국은 2012년 이스라엘과 농업 분야 근로자 도입 협정을 체결, 2만5,000여명의 태국인을 합법적으로 이스라엘 노동시장에 공급하고 있다. 최저임금과 근로조건을 보장하는 협정에 따라, 최초 2년간 일한 뒤 최장 3년10개월 추가 연장이 가능해 총 5년10개월까지 합법적으로 이스라엘에 체류할 수 있는 조건이다. 우돈타니 지역 해외취업 책임자 몽콘 타이로(54)씨는 “과거 이스라엘에도 태국인 불체자 문제가 심각했지만, 합법 체류 기간을 크게 연장하면서 불법체류 문제가 싹 해결됐다”며 “수요와 공급의 원칙이 통용될 수 있는 제도적 틀이 갖춰진다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도 태국과 고용허가제(EPS)를 맺고 합법 파견 근로자에겐 4년10개월의 고용을 보장하고 있다. 다만 양국에서 고용허가를 받고, 기간을 연장하는 절차 자체가 매우 까다롭다는 게 응시자들의 주장이다. 태국인들이 현실적으로 EPS가 아닌 관광 목적으로 한국을 방문한 뒤 허용된 기간을 넘겨 체류하는 ‘리틀 고스트’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익명을 요구한 외교부 고위 관계자는 “한국의 불법체류자 문제는 그 불법성에만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며 “고령화, 저출산 문제를 겪고 있는 한국 상황에 맞춰 대승적인 차원에서 이들을 양성화 하는 방안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방콕ㆍ우돈타니(태국)=정재호 기자 next88@hankookilbo.com
※ 위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태국 방콕포스트ㆍ한국일보의 공동 취재를 통해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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