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세잔과 몬드리안의 심미안
※ 경제학자는 그림을 보면서 그림 값이나 화가의 수입을 가장 궁금해할 거라 짐작하는 분들이 많겠죠. 하지만 어떤 경제학자는 그림이 그려진 시대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생각해보곤 한답니다. 그림 속에서 경제학 이론이나 원리를 발견하는 행운을 누리기도 하죠. 미술과 경제학이 교감할 때의 흥분과 감동을 함께 나누고픈 경제학자, 최병서 동덕여대 경제학과 명예교수가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 연재합니다.
한국 현대 회화를 개척한 김환기 화백의 회고전에 간 적이 있다. 전시장 입구에 그의 작품세계를 소개하는 글에서 화백이 자신의 모습을 묘사한 대목을 발견했다. “굳이 내 얼굴에서 좋은 구석을 찾아내라면 눈이 아닌가 싶다. 눈이 잘 생겼다든다 샛별 같이 빛난다든가 그래서가 아니라, 물상(物象)을 정확히 볼 줄 아는 눈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표현은 예술가에게 있어 눈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또 불의의 비행기 추락사고로 일찍 타계한 소설가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 속에 오아시스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진정 중요한 것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법이라고 말이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사물의 참모습을 보는 눈을 김환기 화백이나 생텍쥐페리는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눈으로는 아무것도 이해 못한다
과학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물에 대한 불변의 법칙을 밝혀내는 일이다. 경제학자 역시 경제현상을 관찰하고 거기에서 일관된 법칙이나 논리체계를 발견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런데 시장을 연구하려는 경제학자가 직접 시장에 나가서 소비자와 생산자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방법으로 그 메커니즘에 관한 법칙을 알아내기는 쉽지 않다. 관찰자가 막연히 현상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는 본질이나 속성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이론은 영어로 ‘theory’이다. 이 말의 어원은 그리스어 ‘theoria’에서 유래한 것인데 이 중 ‘theo’는 ‘본다’는 뜻이다. 이 때 ‘본다’는 것은 막연히 보는 게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본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자동차 구조를 알아본다고 하자. 자동차의 겉모습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은 고작해야 색깔이라든가 문손잡이 모양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자동차의 본질, 즉 운송수단으로서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자동차의 본모습을 알고자 한다면 엔진의 구조와 동력전달장치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겉으로 보이는 사실은 자동차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지 않고 오히려 본질적 모습을 깨닫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모두 제거한 후에 분석을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해야만 자동차의 기본적 구조인 모형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모형이란 이론화 작업의 가장 기초적인 수단으로, 과학자는 모형을 통해 이론을 만든다. 이는 의사가 환자의 겉모습보다는 엑스레이 사진 촬영을 통해서 인체 구조를 보는 것이 환자의 질병을 알아내는 데 도움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단순할수록 현실적인 모형의 역설
경제학자는 복잡한 경제현상을 분석해 하나의 일관성 있는 법칙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경제모형을 사용한다. 이러한 모형을 구축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작업은 복잡한 경제현상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소거해서 단순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델화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가정(假定)의 역할이다. 가정을 통해서 일관성 있는 단순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필수불가결하게 남겨진 본질적인 부분을 가지고 인과관계가 명확히 드러나도록 추상화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이렇게 추상화된 모형의 세계는 결코 현실의 세계가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추상적 모형에 기초한 이론을 가지고 경제학자는 현실을 더욱 잘 설명할 수 있다. 가령, 경제학원론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완전경쟁시장이란 현실적으로는 존재하기 어려운 시장 형태다. 하지만 이러한 완전경쟁모형을 통해서 경제학자는 현실의 시장을 더 잘 분석해내는 것이다.
명탐정 셜록 홈즈나 애거서 크리스티가 창조해낸 에르퀼 푸아로(Hercule Poirot)의 공통적인 특징은 좌충우돌 식의 범행 현장 조사보다는 이러한 범행의 추상화된 모형(일종의 가상적 시나리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사건을 논리적으로 해결하였다는 점이다. 푸아로는 동료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네는 결코 깨닫지 못하겠지. 눈을 지그시 감고서 안락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편이 문제 해결에 보다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는 마음의 눈으로 사물을 꿰뚫어 보게 되는 거라네.” 푸아로의 이 대사는 현실에 대한 모형화(modelling) 작업의 의미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말이다.
◇본원적 사물 형태를 천착한 세잔
과학자와 달리 예술가는 이러한 모형화 작업을 직감적으로 깨닫고 있는 사람이다. 폴 세잔(Paul Cezanne, 1830-1906)은 인상파와 입체파를 연결해주는 고리와 같은 화가다. 그의 추상화 작업에 기초한 화법은 이론경제학자들이 생각하는 경제모형의 구성과 대단히 흡사하다. 세잔이 추구한 아름다움이란 구체적인 사실성보다는 단순함이었다. 세잔은 순간순간 변화하는 색채를 그려내는 인상파의 그림은 미술의 본질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어떠한 환경 변화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캔버스에 표현하려고 하였다. 이는 과학자가 그의 이론을 구축하기 위한 모형화 작업과 비슷한 것이다.
세잔이 추구한 것은 바로 자연과 사물의 변하지 않는 근본적 원형(原形)의 형태에 대한 탐구였다. 그는 자연 속 모든 모양은 삼각형과 사각형, 혹은 원으로 이루어졌고, 사물의 형태는 구와 원통, 원뿔로 단순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가령, 사과는 원이고 산은 원통형으로 단순화될 수 있다. 그의 그림 중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을 보면, 카드놀이하는 두 사람의 머리와 손은 구(球)이고 모자와 팔뚝, 몸통 다리는 원통으로 치환된다.
그는 사물이 가지고 있는 본원적인 구조와 형태에 집착했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입체에 대한 감각은 탁월하고 독보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세잔의 생각은 피카소나 브라크 같은 입체파의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후에 칸딘스키나 몬드리안 등은 사물의 구성을 점, 선, 면이라는 조형원리로 단순화하여 추상미술의 효시가 되었다.
◇몬드리안의 선과 면이 심오한 이유
특히 피트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은 그리려고 하는 대상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기보다 대상의 기본적 구조와 구성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그림에서 자연의 모든 물체는 수평선과 수직선으로 단순화된다. 가령, 나무를 입체로, 입체를 면으로, 면을 선으로 단순화시켜 나가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기하학적인 추상미술을 개척하였다. 몬드리안은 복잡하고 다양하게 보이는 세상을 매우 단순하고 분명하게 표현했다. 복잡하고 달라보여도 모든 사물에는 질서와 규칙이 있고 그것도 통일되어 있다고 믿었다.
몬드리안의 대표작 ‘컴포지션’을 보면 우리 눈에 보이는 나무나 건물들도 궁극적으로는 수직선과 수평선 그리고 그 선들이 만들어내는 면으로 단순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수평선은 보통 땅과 바다를 상징한다. 수직선은 그 바탕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수직선과 수평선이 합쳐지면 모든 생명체가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그의 그림 속에서 선과 선이 만나서 이루는 사각형의 면에는 원색의 색채를 담고 있다. 여기에는 각 개체의 개별적 모습과 삶의 원형이 담겨있다. 몬드리안은 그렇게 수평선과 수직선 그리고 사각형의 원색만으로 자연과 세상 그리고 인간 삶의 역사를 표현했다. ‘회색나무’ 같은 그의 그림을 보면 눈에 보이는 현상이 어떻게 단순화, 추상화되는가를 분명히 보여준다. 그는 쉽고 단순한 표현방식을 빌려 가장 복잡하고 심오한 주제를 그려낸 것이다.
이러한 예술가의 심미안적 사고는 사람을 대할 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사람을 판단할 때 그의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사람이든 내면의 페르소나(persona)는 결코 겉모습으로부터 유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진정한 인간성이란, 마치 우리가 지구에서는 달의 뒷면을 결코 볼 수 없듯이, 그의 속을 들어가 보기 전에는 모른다.
경제이론을 위한 모형화 작업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인간관계에 관한 삶의 지혜도 깨달을 수 있다는 사실은 딱딱한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뜻밖의 보너스 같은 즐거움이다. 보이지 않는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과학자의 엄정한 눈은 사람의 진정한 페르소나를 볼 수 있는 혜안과 같은 것이며, 그것은 또한 예술가의 심미안과 같은 것이다.
최병서 동덕여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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