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질환 의학자… 90년대 허난성 ‘매혈경제 AIDS 파동’ 폭로
해고ㆍ이혼ㆍ美 이주… 中, 그의 사연 다룬 英연극 공연 취소 종용
미국 뉴요커들이 ‘웨스트버지니아 출신이냐’고 묻는 건, 묻는 게 아니라 대개는 조롱이다. ‘촌놈’이라는 의미다. 남쪽으로 더한 곳들도 많지만 굳이 ‘웨스트버지니아’인 까닭은, 지리적으로 적당히 가까우면서 정서 등 면에서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가수 존 덴버가 ‘Take me home Country Road’란 노래에서 “거의 천국”이라고 너무 표나게 추켜세운 탓일 수도 있겠다.
중국 상하이나 칭다오의 도시인들에겐 ‘허난성(河南省)’이 그런 곳이다. 소수민족 자치구를 제외하면, 소위 중원의 한족 위주 광역 행정단위 가운데 가장 가난하고 낙후한, 황허 남쪽 내륙 농업 지역이 허난성이다. 문화대혁명과 대약진운동의 여진이 가장 오래 지속됐고, 70년대 말 덩샤오핑의 개혁ㆍ개방과 80년대 자본주의화 과정에서도 동중국해 도시들에 밀려 소외됐다. 대신 인구는 많아서 31개 성-시-자치구 가운데 경제 선진지역인 광둥(廣東) 산둥(山東)에 이은 3위(2019년 현재 약 9,600만 명)다.
허난성이 1990~95년의 이른바 ‘혈장 경제(Plasma Economy)’의 거점이 된 배경이 그러했다. 혈장 경제란 국가와 성 보건당국이 주민들의 피(혈장)를 헐값에 사들여 혈액제제 제약회사에 비싸게 팔아 넘기는 매혈 경제다. 90년대 초 허난성에선 117개 현(county)에 400여 개 채혈센터가 운영됐다. 센터 입구에는 “팔 뻗어 혈관을 보여주고 주먹만 쥐고 계십시오. 50위안(당시 기준 약 7.5~8달러)을 드립니다” 라는 문구의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어지간한 농가가 1년 농사지어 종자 값 비료 값 빼고 쥘 수 있는 돈이 200달러 안팎이던 시절이었다. 옌롄커(Yan Lianke)의 소설 ‘Dream of Ding Village’에는 한창 때의 허난성 마을들이 ‘쇠 냄새(피 냄새)’로 흥건했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게 과장이나 허구가 아니라는 증언이 있다.(guardian)
하지만 그 돈 냄새, 피 냄새가 사실은 죽음의 냄새였다. 비용과 시간 효율성 때문에 주삿바늘을 재활용하는 일은 예사였고, 채취한 혈액을 원심분리기로 돌려 혈장만 남기고 혈구 등 나머지 혈액성분은 식염수에 섞어 재수혈하는 과정에 타인의 혈액이 섞이는 일도 허다했다. 90년대 중반 이후 주민들은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과 후천성 면역결핍증(AIDS)을 앓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는 2001년에야 저 사실을 처음 공식 인정했다. 당시 중국 보건성 관계자는 매혈로 HIV에 감염된 허난성 주민이 최소 6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인류 최대 최악의 의료 스캔들이었다.
허난성 저우커우(周口)시의 감염질환 연구자 왕슈핑은 매혈자들이 HIV에 무방비로 감염되고 있다는 사실을 1995년 처음 밝혀냈다. 시와 허난성 보건국은 그의 보고를 묵살했다. 모처럼 지역경제에 화색이 돌게 한 혈장경제 자체를 위협하는 거였기 때문이었다. 왕슈핑은 베이징의 국가 보건성 산하 국립바이러스연구소에 샘플 재조사를 의뢰했다. 중국 정부는 이듬해 4월 모든 채혈센터를 잠정 폐쇄했다. 왕슈핑은 그렇게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구했지만, 대가는 훈장이 아니라 수난이었다. 성 당국은 그를 해고했다. 직장 동료였던 남편과는 이혼을 해야 했다. 그는 고향을 떠나 베이징으로, 미국으로 떠돌아야 했다. 그가 9월 21일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시 인근 계곡에서 트레킹 도중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향년 59세.
혈장 경제의 발상 자체도 사실 에이즈에서 비롯됐다. 중국 공산당 정부는 에이즈가 서양의 질병, 자본주의의 질병이라고 선전했다. 85년 6월 중국의 첫 공식 에이즈 사망자도 외국인이었다. 85년 9월 미국에서 수입한 혈우병 혈액제제에서 HIV 바이러스가 발견됐다. 역학조사 결과 약을 쓴 환자 가운데 4명이 HIV 양성반응을 보였다. 중국 정부는 혈장 경제를 통해, 즉 ‘깨끗한’ 중국인의 피로 중국에서 약을 생산함으로써 감염도 막고 무역수지도 개선하고 가난한 농민도 “구제하기로” 했다.
실제로 주민들로선 극히 드문 돈벌이 기회였다. 1인당 월 2회 매혈 규제도 무의미했다. 한 남성은 가디언 기자에게 2, 3일마다 1리터씩 팔았다고 말했다. 그런 이들이 센터마다 하루 평균 적은 곳은 200명, 많은 곳은 500~600명씩 몰려 들었다. 그들은 한 번에 500cc씩 두 차례 1리터의 피를 뽑은 뒤 혈장을 분리하고 남은 혈액을 식염수와 섞어 다시 수혈 받았다. 그들은 문화대혁명 시대의 ‘허삼관‘(위화의 소설 ‘허삼관 매혈기’의 주인공)과 달리, 피 일부를 되돌려 받아 심리적 저항감도 적었다. 다른 점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소설은 ‘피를 (많이) 못 파는 남자는 남자도 아니다’라는 마초의식을 가부장 문화의 바닥에 깔고 있지만, 90년대 혈장 경제의 매혈 주체는 주로 여성이었다. 남자의 피는 가문ㆍ혈통의 정수지만, 여자의 피는 어차피 생리혈로 흘려버릴 피라는 인식 때문이었다.(nyt, 2000.10.28)
왕슈핑이 91년 저우커우 시의 한 혈장센터 부책임자(책임자는 군인)로 발령받아 한 일은,매혈자의 혈액을 ‘검품’하고 관리하는 일이었다. 검사 항목은 달랑 둘, 혈액형과 B형 간염 감염 여부였다. 그가 처음 걱정한 건 C형 간염의 확산이었다. 그는 91년 말 혈액 샘플조사를 통해 C형 항체 양성반응 비율이 최대 84.3%에 이른다는 사실을 확인했다.(WP) B형 간염과 달리 C형 간염은 항체 검출 자체가 바이러스 감염ㆍ증식의 의심 요소다. 그는 그 사실을 시 보건당국에 보고, 조사 항목에 C형 간염을 포함시키고 채혈 방식을 개선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당국은 묵살했다. 그는 92년 7월 베이징 국가 보건성에 자신의 조사결과를 직접 보고했다. 정부 조사단은 현장 실사를 통해 93년 2월 왕슈핑의 보고서가 옳다고 결론짓고 7월부터 모든 혈장센터의 C형 간염 테스트를 의무화했다. 하지만 왕슈핑은 ‘지휘계통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93년 3월 혈장센터 현장에서 쫓겨나 시 보건국 의료팀(Medical Affairs Office of the health Bureau)으로 인사조치됐다.
그가 윈난성 일대의 마약중독자 AIDS 확산에 관한 논문을 처음 읽은 게 93년 그 해였다. 한 AIDS 환자가 다른 지역 3곳에서 매혈한 일이 드러나기도 했다. 그는 보건국에 건의해 어렵사리 독자적인 HIV 임상실험실을 열었다. 예산 지원 없이 실험실과 인력 3명만 지원 받는 조건이었다. 그는 장비와 HIV 진단키트를 자비로 구입, 95년 초 혈장센터 3곳에서 수집한 혈액 샘플 409개 중 13%인 55개 샘플에서 HIV양성 반응을 확인했다. 그리고 결과를 시 보건국에 보고했다. 반응은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반색하며 공을 치하하더니 2주 가량 지난 뒤부터 다시 태도가 바뀌어 “테스트가 잘못된 것 아니냐”고 몰아붙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95년 3월 다시 베이징 바이러스학연구소에 55개 샘플의 정밀 진단을 의뢰했다. 개당 700 위안의 진단 비용도 그가 지불했다. 중국 보건성은 96년 4월 전국의 혈장센터를 폐쇄했고, 11월 HIV진단 시스템을 갖춘 곳부터 다시 제한적으로 문을 열게 했다.
노다지 혈장경제는 그렇게 끝이 났다. 최소 300만 명이 혈장을 팔았고, 그 중 최대 40%가 HIV에 감염됐다는 추정도 있다. 2018년 가디언 인터뷰에 응한 허난성의 한 마을 주민은 “99년 무렵부터 AIDS 환자가 생겨나 주민 2,000여 명 가운데 약 200여 명이 숨졌다”고 말했다. 매혈자는 주민의 약 1/4인 500명 정도였다.
왕슈핑은 1959년 10월 20일 허난성 푸거우 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의사였고, 아버지는 중등학교 수학교사였다. 슈핑이 7살이던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됐다. 혁명 전 국민당 군인이었던 아버지는 ‘반혁명분자’로 몰려, 고깔 모양의 이른바 ‘바보모자’를 쓰고 인민재판에 회부됐다. 8살 슈핑은 아버지의 죄상을 공개 고발하라는 홍위병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했다. 훗날의 집념과 고집을 근거로, 그가 의지로 떠세에 저항했다는 말도 있다. 어쨌건 그 탓에 그는 학교에서 쫓겨났다. 창문 너머로 칠판을 엿보며 공부하다 아이들이 창문을 닫아버리는 바람에 되돌아와야 했던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5년 뒤인 72년, 공산당원이던 친척에게 입양된 뒤에야 다시 학교를 다니게 됐다. 이후 그의 성(姓)이 주씨에서 왕씨로 바뀌었다. 83년 허난대 의대(감염질환 전공)를 졸업, 86~91년 저우커우 질병예방통제센터에서 간염 감염경로 등을 연구했고, 91~93년 혈장센터를 거쳐 93~96년 시 보건국에서 HIV 임상센터를 운영했다.
AIDS파동 직후인 1996년 7월 허난성에서 열린 보건 콘퍼런스에서 한 고위 관료가 “감히 중앙 정부에 직접 보고한 저우커우 보건국 임상실험실의 건방진 녀석(man)”을 공개 비난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왕슈핑은 곧장 일어나서 “당신이 방금 말한 그 건방진 녀석이 바로 접니다. 하지만 저는 여자이고, 저는 보고서를 지역 보건국에 먼저 제출했습니다”라고 따졌다. 그 관료는 “당장 꺼지라”고 고함을 질렀다고 한다.
그는 그 해 말 해고됐다. 해고 사유는 센터 운영 규칙 위반이었지만, 진짜 이유는 뻔했다. ‘국민당 스파이의 딸’은 이제 허난성 보건의료인들의 명예를 짓밟고 지역경제를 망친 ‘바이러스’였다. 시 보건국에서 함께 일하던 남편(Geng Honghai) 역시 ‘모진 아내’를 둔 탓에 직장에서 따돌림을 당해야 했다. 왕슈핑은 6살 딸을 두고 베이징으로 쫓겨나듯 이주, 중국 예방의학아카데미의 무보수 연구원으로 만 5년을 일했다. 그 사이 부부는 이혼했다.
허난성 성도 정저우(鄭州)의 산부인과 의사 가오 야오지에(高耀潔, 1927~)는 중국 HIV예방 캠페인과 AIDS환자 권익운동의 상징적 존재다. 그는 1996년 허난성의 첫 공식 AIDS 사망자로 기록된 한 여성환자를 돌본 이래, 사비를 털어 HIV 예방 팸플릿을 제작해 지역 병원과 시민들에게 배포하고, 해열제와 진통제로나마 환자들을 보살폈다. 그가 왕슈핑을 알게 된 것도 1996년이었다. 왕슈핑은 HIV감염 경로와 실태, AIDS 발병과 진전 추이 등 연구 자료를 지속적으로 가오에게 전달, 당국의 적극적인 조치를 촉구하게 했다. 1996~2001년 베이징 미국 대사관에서 일한 전 외교관 데이비드 코히그(David Cowhig)라는 이는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왕슈핑은 당시 중국의 HIV/AIDS 감염 실태에 관한 한 신뢰할 만한 거의 유일한 정보원이었다”고 말했다. 왕슈핑은 가오의 ‘은밀한 배후(quiet insider)’이자, 중국 에이즈 원년의 내부고발자였다.
왕슈핑은 2001년 가을 위스콘신 의대 연구원으로 채용돼 미국으로 이주했고, 유타 주의 한 아쿠아리움 재무책임자(CFO)와 재혼한 뒤 솔트레이크시의 유타주립대 암연구센터에서 일했다. 그는 직접 정한 영어 이름 ‘선샤인’처럼 무척 활달하고 유쾌해서, 기자와 인터뷰하는 자리에 무지개 색 발가락 양말을 신고 나온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남편과 훗날 미국으로 건너온 딸 외에 오빠의 두 아이를 입양했고, 샴고양이 빌리(Billiy)와 베이글(Bagel)이란 이름의 개와 함께 지냈다. 그가 빌리의 영특함을 자랑하는 유튜브 동영상이 볼 만하다.
2019년 9월 영국 런던 햄스테드 시어터(Hampstead Teahtre)가 ‘지옥궁의 왕 The King of Hell’s Palace’이란 제목의 연극을 초연했다. 로열셰익스피어컴퍼니 출신의 연출가 마이클 보이드(Michael Boyd)가 연출을 맡은, 왕슈핑과 90년대 중국 혈장경제 이야기였다. 왕슈핑은 9월 프리미어 직전 인터뷰에서 중국 공안요원이 저우커우의 옛 동료와 친척들을 협박해 공연 취소를 종용했다며 “내가 직접 그들에게 맞서는 것보다 친구나 친척을 인질 삼아 내 입을 막으려는 시도에 저항하는 일이 더 힘들었다”며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침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거짓말 같은 죽음에 일부 외신은 ‘명백한’ 심장마비라고 굳이 적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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