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민음사에 지난달 28일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82년생 김지영’ 소설책을 큰 활자본으로 구할 수 있는지 문의하는 전화였다. 주말에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보고 감동받은 84세 할머니가 “여자도 사람인데 남자와 똑같이 존중받지 못하고 살았던 지난 세월을 돌아보게 됐다”면서 원작 소설도 꼭 읽어 보고 싶다고 손녀에게 부탁했다는 것이다. 박혜진 민음사 차장은 “김지영 중심으로 전개되는 소설과 달리 영화에는 어머니와 그 어머니를 바라보는 외할머니, 주변 가족의 이야기까지 담기면서 세대를 뛰어넘어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된 것 같다”며 “덕분에 30대와 20, 40대 여성 중심이었던 소설 독자층도 중장년층과 남성으로까지 넓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한국 사회에 여성주의 담론을 불지피는 계기가 됐듯이, 동명 영화도 여성의 현실을 다시금 일깨우며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극장가 비수기임에도 개봉 5일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했고, 지난달 30일까지 166만명을 불러 모아 손익분기점(160만명)을 넘었다. 상영 2주째 주말에는 200만명 돌파도 무난할 걸로 전망된다. 출산과 육아, 가사 노동, 그로 인한 경력 단절, 성장 과정에서의 일상적 성 차별, 직장과 사회의 유리천장 등 30대 기혼 여성 김지영(정유미)이 겪어 온 일상은 여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보편적 경험이다. 관객들은 “내 이야기”라며 뜨겁게 호응하고 있다. 재미 여부가 거론되는 여느 영화들과는 달리 ‘82년생 김지영’ 후기에선 관객들의 경험담 고백이 눈에 많이 띈다. 스크린 밖에서도 다양한 사례가 모이고 엮이며 ‘또 다른 김지영의 서사’가 만들어지고 있다.
공통된 관객 반응은 영화가 현실에 비해 순화됐다는 것이다. 영화는 ‘순한 맛’, 현실은 ‘매운 맛’ 또는 ‘불 맛’이라는 비유도 있다. 영화에선 가정 폭력이 일어나지도 않고, 시가 식구도 가부장적이긴 하나 며느리를 하인 취급할 정도로 매정하지는 않다. 남편 대현(공유)은 지영이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는 걸 알아채고 아내를 위해 육아 휴직을 고민한다. 직장인 신소이(24)씨는 “좋은 남편으로 묘사되는 대현도 임신 출산 과정에서 여성이 감당하는 희생에는 무심한 걸 보면서 실제 현실은 얼마나 힘겨울까 싶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두 아이를 키우는 직장인 박선미(38)씨도 “남자는 육아까지 하면 칭찬받지만 여자는 육아를 하는 게 당연할 뿐 아니라 아이가 다치기라도 하면 엄마 탓이라고 비난당하는 현실이 새삼 떠올라 심경이 복잡했다”고 했다.
극장은 매번 눈물 바다다. ‘영화를 보는 도중 옆자리에서 갑자기 두루마리 휴지가 건너와서 내 몫을 뜯고서 다음 사람에게 넘겼다’는 후기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라오기도 했다. 지영이 빨래를 개는 동안 대현이 캔맥주를 마시고 있거나, 지영의 아버지가 아들만 챙기는 장면에서 한탄하는 추임새를 넣는 관객도 많다. 영화 삽입곡을 따라 부르는 ‘싱어롱’처럼 영화 보면서 맘껏 욕할 수 있는 ‘욕어롱’ 상영관, 눈치 보지 않고 소리 내 울어도 되는 ‘오열관’을 열어 달라는 글도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경험의 보편성을 기반으로 관객들이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로 만들어 간다는 점이 ‘82년생 김지영’의 서사가 지닌 힘이자 특징”이라고 평했다.
개봉 전부터 쏟아진 평점 테러와 일부 혐오 악플이 조명되며 ‘젠더 갈등’에 초점이 맞춰지기도 했지만, 실제 영향력은 미미하거나 무시될 수준이다. 포털사이트에서 실제 관람객 평점(10점 만점)도 남자 9.26점, 여자 9.57점(지난달 30일 기준)으로 큰 차이가 없다. CGV의 관객 평점인 골든에그지수 역시 93%로 높다. 앞서 지난 3월 영화 ‘캡틴 마블’이 악의적인 평점 테러에도 580만 흥행을 했던 상황과 비슷하다.
여성만을 위한 영화라는 선입견도 지워지고 있다. CGV 관객 분석에 따르면 개봉일인 지난달 23일 관객 성별 비율은 여성 78.6%, 남성 21.4%로 나타났지만, 첫 주말(지난달 27일)을 지나면서 여성 73.5%, 남성 26.5%로 남성 비율이 5.1%포인트나 증가했다. 연령별 비율을 살폈을 때 20대가 37.3%에서 37.5%로, 30대가 30.4%에서 29.2%로 변동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과도 비교된다. CGV 관계자는 “젊은 연인과 중년 부부는 물론 남성 관객끼리 관람하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다”고 전했다. 직장인 정석진(37)씨는 “‘내가 이 영화에 공감할 만한 남편이냐’고 아내에게 물었더니 ‘당신이 꼭 봐야 하는 영화’라고 꼬집어서 뜨끔했다”면서도 “아내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좋은 기회가 될 거 같아서 영화 표를 예매했다”고 말했다.
‘82년생 김지영’은 해외 관객과도 교감하려 한다. 베트남(1일)과 홍콩ㆍ호주ㆍ뉴질랜드(7일), 싱가포르(14일), 인도네시아(20일), 대만(22일)에서 이달 개봉한다. 원작 소설은 한국에서 120만부가 팔렸고, 일본과 중국, 대만에서도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영화 개봉 직후 국내 소설 판매량도 10배가량 늘었다. 박혜진 민음사 차장은 “영화를 통해 이야기를 접한 사람이 많아지면서 소설에 대한 그릇된 편견도 바로잡히고 있다”고 말했다.
소설과 영화의 흥행은 사회 변화에 대한 요구로 이어지고 있다. 권김현영 여성학 연구자는 “특별한 사건 없이도 여성이 처한 숨막히는 현실을 설득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영화적 성취라 본다”며 “개인의 운이나 노력으로 해결되지 않고, 사회가 나서야 하는 구조적 문제라는 사실을 환기했다”고 평했다. 그는 “공감을 넘어 ‘지지한다’는 반응이 나오는 건, 영화가 사회적 맥락 안에서 관객으로부터 어떠한 입장을 이끌어낸다고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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