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능범죄, 당신을 노린다] <17> 신고부터 어려운 ‘몸캠 피싱’
“1차 경고다. 당사자한테 먼저 보낸다. 합의하면 동영상을 지우고 합의가 안 되면 주소록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유포된다. 조용히 마무리 짓자.”
정신이 퍼뜩 들었을 땐 이미 늦은 거였다. 조금 전까지 연인처럼 다정하게 영상통화를 하던 그녀가 돌변했다. ‘뭐가 잘못 된 걸까’ 생각할 겨를도 주지 않았다. 이내 스마트폰에 낯 뜨거운 동영상 하나가 도착했다.
몸에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남성이 주인공이었다. 시뻘개진 얼굴로 성적인 행위를 했다. 누구나 알아볼 만큼 얼굴이 선명했다. “계좌로 200만원을 보내라. 아니면 가족들이 제일 먼저 이 영상을 보게 된다.” 협박이 이어졌고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평범한 대학생 A(19)씨가 ‘몸캠 피싱’ 피해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영상통화 1분 만에 다 털렸다
지난해 3월 28일 강원경찰청 사이버테러수사팀에 A씨 사건이 접수됐다. A씨는 돈을 200만원 보내고도 결국 아버지가 그 영상을 보는 걸 막지 못했다. 충격으로 식음을 전폐하다 못해 대인기피증에 걸렸다고 했다. A씨가 수사팀에 진술한 경위는 이랬다.
어느 날 모르는 사람에게서 페이스북 친구 신청이 들어왔다. 얼굴도 몸매도 예쁜 ‘혜은’(범죄조직이 내세운 가명)이었다. 호기심에 수락 버튼을 누르자 금방 대화가 시작됐다. “안녕? 프사(프로필 사진)가 멋있네, 몇 살이야?” “지금 뭐해?” “나는 그냥 누워서 폰 만지고 있어.” “나도 그런데.”
일면식도 없는 남녀는 금방 친해졌다. “우리 카카오톡으로 넘어가서 대화할까?” “좋지, 아이디 알려줘.” 좀 더 익숙한 곳으로 넘어가자 혜은이는 대화의 수위를 점점 높아갔다. “네 사진 보니까 흥분 되는데, 영통(영상통화)할래?”
그렇게 시작된 영상통화 속 혜은이는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A씨도 모두 벗었다. 10초쯤 지났을까 갑자기 영상통화가 뚝 끊겼다. 혜은이가 카카오톡으로 파일 하나를 전송했다. “지금 소리가 잘 안 들려. 이 파일을 설치하면 음질이 더 좋아지니까 이걸 깔자.”
이미 사리판단 능력을 상실한 A씨는 시키는 대로 다 했다. 혜은이의 요구에 휴대폰 화면에 혀를 갖다 대기도 했다. 두 사람은 각자의 화면 속에서 성적행위를 열심히 했다. 그렇게 1분이 흘렀고 영상통화가 종료됐다.
알고 보니 모든 게 가짜였다. 영상 속 여성이 무서운 아저씨로 돌변하는 데는 5분도 안 걸렸다. 혜은이가 전송한 파일을 설치하는 순간 A씨 휴대폰 속 모든 연락처와 문자메시지는 중국에 있는 서버로 전송됐다. 휴대폰 화면에 혀를 갖다 대라고 했던 건 A씨의 얼굴이 정확하게 찍히도록 유도하는 수법이었다. 혜은이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가상의 인물이었다. 화면 뒤에는 남성 조직원이 있었다. 여러 경로로 입수해둔 야한 영상을 채팅화면으로 내보인 것이었다.
◇파도 파도 끝이 없는 피해자
“팀장님, 여기 좀 보세요. 이거 심상치 않은데요.” A씨가 돈을 보냈다는 계좌를 따라가던 사이버테러수사팀 김두호 형사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은행계좌를 하나 둘 확인하는 과정에서 피해자와 피해금액 규모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몸캠 피싱과 조건만남사기를 합쳐 이 조직에 당한 피해자는 3,700여 명, 피해액은 55억원에 달했다.
수사팀이 추적한 결과 그물망처럼 서로 이어진 조직의 계좌는 120개나 됐다. 모두 타인 명의의 통장(대포 통장)이었다. 통장들을 돈의 흐름에 따라 1차, 2차, 3차 단계별로 구분해 그림을 그리니 피라미드 형태가 됐다.
최초 피해자들로부터 뜯어낸 돈이 1차 계좌 27개에 입금되면 이것이 2차 계좌 20여 개로 모였다. 다시 3차 계좌 1개로 종합된 뒤 최종적으로 인출계좌 59개로 흩뿌려졌다.
수사 착수 2주 만에 인출 통장에서 나온 돈을 부지런히 옮기는 사람이 수사망에 걸려들었다. 이른바 ‘인출책’이다. 수사팀은 피해금을 인출한 금융기관 주변 폐쇄회로(CC)TV 분석 등을 통해 인출책 2명의 신원을 특정했다. 기존의 수사였다면 대부분 이 단계에서 검거를 한다. 하지만 수사팀 정광훈 팀장은 인출책들의 뒤를 쫓으며 좀 더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이들이 매일 꾸준히 7,000만원에서 1억5,000만원을 인출했는데, 그 금액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정 팀장은 “우리도 여태 이런 금액을 빼가는 걸 본 적이 없어서 스스로 반신반의했다”고 말했다.
◇5주 잠복 끝에 급습한 은신처
인출책은 고도로 훈련된 소위 ‘꾼’이었다. 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이동은 반드시 전철로 했다. 잠도 일정한 곳에서 자는 법이 없었다. 하루는 서울에서, 하루는 경기에서 자는 식이었다.
오후 2시쯤 활동을 개시해 다음날 새벽 2시에 하루를 마무리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서울지하철 2호선 내선순환을 타고 빙빙 돌기도 했다. 그러다 수사팀 눈에 특이점 하나가 잡혔다. 하루 종일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가도 특정 시점이 되면 서울 동대문시장 인근의 신당역을 들렀다. 수사팀 5명은 같은 해 4월 말 짐을 싸 신당역 인근에 임시본부를 꾸렸다.
강원도 경찰들에게 신당역 일대는 별천지였다. 동대문시장 일대는 유동인구가 하루 80만명이 넘는 곳이었다. 오후 6시가 되면 의류 쇼핑몰들이 문을 열었고, 다음날 오전 6시가 돼야 문을 닫았다. 도매로 물건을 사가는 이들 중에는 중국인도 많았다. 중국으로 보내는 물량이 많다 보니 1, 2억원쯤 현금을 들고 다니는 건 예삿일이었다. 피싱 범죄조직이 뜯어낸 돈은 이곳에서 화장품, 의류들로 세탁이 돼 중국으로 보내졌다.
5주 동안 잠복한 수사팀은 경력 지원을 받고 중국어 통역까지 대동해 7월 16일 조직의 은신처 3곳을 동시다발적으로 급습했다. 국내자금 총책과 인출책, 대포통장 공급 총책 및 모집책, 판매자 등 30명을 일망타진해 6명을 구속했다. 경찰이 대포통장 판매자부터 자금관리책까지 한번에 검거한 건 최초였다.
◇신고 못하는 약점 파고든 악질적 수법
이 사건은 피해 규모가 클 뿐 아니라 범죄수법이 매우 잔인해 수사팀도 혀를 내둘렀다. 신고가 어려운 피해자의 약점을 교묘히 파고들며 끊임없이 고통을 가했기 때문이다.
조직원들은 처음에 몸캠 피싱 피해자에게 “우리의 목적은 돈”이라며 합의금 명목으로 일정 금액을 요구한다. 돈을 보내면 영상을 지워줄 것처럼 말하지만 결코 한 번에 끝나는 법은 없다. 하나의 영상을 둘로, 다시 셋으로 쪼개놓고 그 다음 영상도 남아 있으니 돈을 추가로 보내야 한다고 협박한다. 그것도 모자라 “지금까지 지운 건 복사본이었고, 원본 파일을 지우려면 기술이 필요하니 돈이 또 필요하다”면서 더 많은 금액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 조직은 송금 내역을 캡처해 보내라고 요구하는데, 여기 적힌 통장잔액을 보고 ‘얼마까지 뽑아먹을 수 있겠다’고 소위 간을 본 것으로 조사됐다. 한 중년 남성 피해자는 단계별로 차례 차례 뜯겨 총 1억원을 보내기도 했다.
다른 피해자 B씨는 가진 돈이 없다며 버텼지만 가족에게 영상이 전송되자 결국 1년 동안 겨우 모은 3,000만원을 고스란히 바쳤다. 조직은 그것도 모자라 대출을 강요한 뒤 탈탈 털어갔다. 심지어 B씨에게서 통장까지 빼앗아 대포통장으로 이용했다.
피해자들은 경찰 조사에서 “신고 자체가 어려웠다”고 그간의 고통을 털어놨다. 몸캠 동영상을 찍혔다는 사실 자체가 수치스럽고, 영상 유포로 사회에서 매장되는 게 두려웠던 탓이다. 나중에 수사팀이 따져봤더니 피해자들의 신고율은 14% 정도에 불과했다.
◇대포통장 전문 모집책까지, 갈수록 조직화
경찰 조사 결과 피싱 조직 대포통장모집 책임자 3명은 모두 대구 출신인 동네 친구들이었다. 이들은 2017년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에 중국으로 건너가 보이스피싱 조직의 유인책으로 취업했다. 하지만 중국에서의 범죄는 오래 하지 못했다. 유인책은 전화로 은행원, 검사, 경찰 등을 사칭해야 하는데 이들의 경상도 사투리 때문에 성공률이 현격히 낮았다. 흠씬 두들겨 맞고 쫓겨난 3명은 중국 생활 당시 친하게 지내던 선배로부터 제안을 받고 대포통장 모집으로 재기를 노렸다.
이들은 주변의 친한 친구 18명에게 통장 1개 당 30만~100만원씩 주기로 약속하고 대포통장을 모았다. 혹시 경찰에서 연락이 오면 “대출 사기를 당한 것”이라고 말하라는 대응법까지 일러줬다. 친구들은 쉽게 돈을 벌 수 있단 생각에 1명 당 통장 3, 4개를 만들어 팔았다.
대포통장 모집책을 비롯해 법정에 선 조직원들은 하나 같이 혐의를 부인했다. 자금 인출책들은 “도박자금이라고 생각했을 뿐 공갈이나 사기 피해자가 입금한 돈이란 걸 몰랐다”고 잡아뗐다. 국내자금총책도 마찬가지였다.
사건을 심리한 춘천지법은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모두 공범으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피싱 범죄는 수사기관의 단속을 피하기 위해 각자의 역할에 따라 긴밀히 연결된 공범들이 전체 범죄를 완성하는 것”이라며 “어느 한 역할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으면 범행을 완성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춘천지법은 지난 7월 사기 및 공갈, 전자금융거래법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인출책 2명과 국내자금총책에게 각각 징역 3년 6월을 선고했다.
◇경찰과 피싱 조직 간 계속되는 수싸움
이번 사건은 피싱 조직의 덩어리를 국내 총책까지 싹 들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그러나 뿌듯함도 잠시. 국내 조직원들에게 일제히 수갑을 채운 지 보름 만에 중국에 있는 총책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정황이 수사팀에 포착됐다.
국내에서 피해자들에게 뜯어낸 돈이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흘러간 것까지는 확인이 가능한데, 그 이후부턴 한국 수사팀이 손을 쓰기가 힘든 영역이다.
중국에 거점을 둔 피싱 조직 추적은 더욱 까다로워졌다. 현금에서 상품권으로, 또는 가상화폐로 범죄 수익금을 세탁하는 창구도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다. 이런 이유로 강원경찰청은 지난 4월 중국 지린성(吉林省) 공안청을 방문해 실무회담을 개최하고 연락관을 운영하기로 했다. 각종 피싱 범죄가 지능화되고 피해가 급증, 국제 공조수사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정 팀장은 “중국에서 범죄조직이 활동을 멈추지 않는 한 국내에서는 피해가 계속 발생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춘천=박진만 기자 bpbd@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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