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의장님이 오시면 가급적 호텔 밖에는 나가시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문희상 국회의장의 일본 방문이 결정된 올해 10월쯤 일본 측은 우리 실무자들에게 이런 의견을 전달했다고 한다. 4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의회 정상회의 참석 일정을 조율하고 있을 때였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해결하려면 일왕이 사과해야 한다”는 올해 초 문 의장의 발언에 일본 국민이 ‘화’가 났으니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는 게 일본 측의 취지였다. 문 의장을 초청한 일본 측은 분노한 우익 세력 때문에 ‘아찔한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을 우려한 듯하다. 일본 한인 사회에서도 문 의장을 겨냥한 혐한 시위가 벌어질까 긴장했었다고 한다.
이에 문 의장이 일본에 머무는 동안 외부 식사 일정을 최소화하고, 이동 시 경호 차량도 줄인다는 일종의 ‘안전 수칙’이 양국 협의를 거쳐 마련됐다. 상대국 국가 의전서열 2위를 초청해 놓고 ‘눈에 띄지 말라’는 취지의 주문을 한 것은 외교적으로 이례적인 일이다.
그러나 문 의장이 일본으로 향하기 직전 일본이 보인 태도는 안전 수칙의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 의문을 품게 했다. 일본 산케이(産經)신문은 지난달 31일 “문 의장이 (위안부) 발언을 철회하지 않으면 회담에 응하지 않겠다”는 산토 아키코(山東昭子) 일본 참의원 의장의 발언을 보도했다. 문 의장이 서한을 통해 사과의 뜻을 전하려고 했지만, 일본이 반송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문 의장은 이달 3일부터 나흘간 일본에 머물며 주요 인사들과 만나 양국 관계 개선의 실마리를 찾으려 했으나, 일본 인사들은 갑자기 만나지 않겠다고 등을 돌렸다. 일본이 국빈급 손님을 ‘홀대’하는 이상한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우리 정치인들이 부정적인 국내 여론에도 연이어 일본에 간 건 ‘지금의 상황을 더는 방치해선 안 된다’는 정치ㆍ외교적 대의를 앞세웠기 때문이다.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를 위해 관계를 되돌리려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어땠나. 문 의장을 비롯한 한국 정치인들을 함부로 대하는 ‘한국 때리기’로 우익 세력의 마음을 사려 한 건 아닐까. 그런 의심을 기우라고 치부하기에는 일본이 문 의장에게 보인 태도가 지나치게 싸늘했다. 일본은 더 이상 우익 세력을 이용한 자국 정치에만 매몰돼선 안 된다. 양국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란 점을 되새기며 서둘러 관계 회복에 나서야 한다. 지금의 상황이 계속된다면 일본도 감당하기 힘든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류호 정치부 기자 h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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