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상생-협력 손 내미는 태국
52년 전 동남아국가연합(ASEANㆍ아세안) 창설을 주도한 태국은 아세안의 오랜 맹주다. 해양 아세안에 인도네시아가 있다면, 대륙 아세안에서는 태국이 있는 식이다. 지난해 기준 인구 약 7,000만명에 국내총생산(GDP) 5,050억달러 수준으로, 경제적으로도 인구 1억의 베트남과 비교해 2배 규모다.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이 포함된 메콩 5개국이 ‘바트(Bahtㆍ태국화폐) 경제권’으로도 불리는 이유다. 하지만 태국은 ‘중진국의 함정’에 빠지면서 2010년 이후 성장률이 1~3%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메콩 지역 나머지 4개국 평균치(6~7%대)를 한참 밑도는 수준이다.
◇ ‘전열’ 가다듬는 태국
하지만 긍정적인 신호 하나가 들어왔다. 2010년까지 7%대의 성장을 하다 2011년 만난 대홍수 탓에 0.8%로 거꾸러진 뒤 좀처럼 재기하지 못하던 태국이 지난해 4%대(4.1%ㆍ태국중앙은행) 성장률을 기록한 것이다. 이는 최근 5년 내 가장 높은 수치다.
배경으로 여러 가지가 거론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수도 방콕 남쪽의 공업지역, ‘이스턴 시보드’(Eastern Sea Board)를 중심으로 한 동부경제회랑(EEC) 개발에 태국 정부가 팔을 걷어붙인 사실이 첫손에 꼽힌다. EEC는 4차 산업혁명으로 대표되는, 전기차, 바이오, 디지털 등 12개 핵심 미래산업 육성을 위해 내세운 ‘태국 4.0’ 정책을 실현하는 물리적 토대다.
EEC는 방콕 남쪽의 차층사오, 촌부리, 라용 등 3개 주의 낙후 공업지역을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 지정한 경제특구로, 2018년 발효된 ‘EEC 특별법’에 따라 도로, 고속철도, 심해항, 공항 등 광범위한 기반시설 정비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두앙짜이 아사와친따칫 태국 투자청(BOI) 청장은 “계획이 발표된 지난 2017년부터 5년간, 500억달러(약 58조원)를 들여 인프라 구축과 도시 개발사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며 “장차 태국을 ‘함정’에서 빼낼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방콕에서 차로 2~3시간 달리면 닿을 수 있는 EEC는 지난 2011년 태국 경제를 멈추게 했던 대홍수 사태 당시에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EEC 내 가장 많은 산업단지를 개발, 운영하고 있는 WHA그룹 홍보담당 시야파스 짠타샤이로씨는 “EEC 개념은 오래 전부터 있던 것이지만, 뒤늦게 정부가 주목, 민간사업을 국가사업으로 키운 것”이라며 “일본뿐만 아니라 다양한 국적의 기업 유치에 방점이 찍혀 있다”고 말했다. WHA에 따르면 EEC 내 입주 기업 38%가 일본 기업일 정도로 일본 자본 의존도가 높다. 이어 유럽(EU) 국가 기업들이 20%를 차지하며, 한국 기업은 전체 2% 미만이다.
◇ 늘어나는 비(非)일본 투자
민간 산업단지가 경제특구로 지정돼 기반시설들이 깔리고 거기에 온 기업들에 세제 혜택 등의 인센티브를 부여하자 분위기는 금세 달라지고 있다. WHA 관계자는 “중국과 홍콩의 투자 문의가 눈에 띄게 늘고 있다”며 “중국 기업들이 빈 부지를 속속 차지하고 있다”고 전했다.
외국인직접투자(FDI) 통계서도 이 분위기는 그대로 확인된다. 지난 2017년 113억7,000만달러 수준이던 중국 기업의 투자는 지난해 328억1,000만달러로 3배 가까이 늘어났다. 여기에 더해 올 상반기만 365억7,000만달러를 찍었다. BOI 관계자는 “미중 무역전쟁 여파도 있겠지만, 이곳의 전략적 위치 등 투자 목적지로서 태국이 가치를 평가받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태국의 이 같은 일련의 정책이 일본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고도의 행정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일본의 도움으로 태국이 어느 정도 성장은 했지만, 추가 성장에는 일본의 투자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태국 현지 일본 기업 소식에 정통한 관계자는 “문제는 일본이 원천 기술은 주지 않고 태국의 자원으로 생산만 하고 있는 데 있다”라며 “태국 4.0과 EEC 경제특구는 지난 시간에 대한 반성의 결과물”이라고 말했다. 실제 지난 9월 한ㆍ태 양국 정상간 회담에서 태국은 한국과의 4차산업 분야 협업 강화를 희망했다. 기술 개발 없이는 성장이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외에도 일본에 대한 태국 현지의 피로도는 심상치 않게 감지 된다. 일본이 태국 내 생산기지를 태국 바깥으로 옮기는 이른바 ‘타이+1’ 정책을 본격 추진하자 이를 붙잡기 위해 태국 정부는 자동차 첫 구매자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는 정책을 펼쳤는데,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는 셈이다. 2011년 대홍수 당시 도요타, 니콘 등 일본 기업들이 큰 피해를 보면서 일본의 ‘타이+1’정책이 본격화했다.
김현태 KOTRA 방콕 무역관장은 “금융, 로펌, 세무 분야에서 한국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때문에 메콩의 중심, 태국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라며 “스마트시티, 디지털콘텐츠 등 상호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분야를 발굴해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방콕=정민승 특파원ㆍ조영빈 기자
※ 위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태국 방콕포스트ㆍ한국일보의 공동 취재를 통해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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