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격변의 물결 인도차이나
정치 불안하고 경제 어려운 태국 옛 존재감ㆍ리더십 못 보여줘
남중국해 中 ‘맞짱’ 베트남. 내년 세계 외교무대서 리더십
‘아시아 마지막 기회의 땅’ 미얀마, 베트남 벤치마킹
지난 4일 저녁 태국 방콕 임팩트컨벤션센터에서 진행된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ㆍ아세안) 정상회의 폐막식. 미디어센터 한쪽에서 실시간 전송돼 오는 화면으로 취재를 하던 수십 명의 베트남 기자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올해 아세안 의장국인 태국의 쁘라윳 짠오차 총리가 응우옌 쑤언 푹 베트남 총리에게 의사봉을 넘기고, 푹 총리가 그 의사봉을 머리 위로 들어 보이는 장면이었다. 차기 의장국, 베트남의 임기가 시작되기까지는 두 달 가까운 시간이 남았지만 사실상 아세안의 힘이 차기 의장국으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의장국이 회의 마지막에 차기 의장국에 의사봉을 넘기는 행사는 매년 연출되는 통상적인 장면. 하지만 올해만큼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거듭된 정치 불안정과 낮은 경제성장률의 태국, 안정된 정치를 바탕으로 한 견고한 경제성장, 또 그를 토대로 역내 목소리를 키우고 있는 베트남의 모습이 교차하면서 아세안 패권의 지각변동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해석됐다.
◇예전 같지 않은 태국
8년 만의 선거와 69년 만의 대관식 등 굵직한 이벤트들을 치르면서 올 한해 아세안을 이끈 태국에 대한 평가는 대체적으로 긍정적이다. 아세안 외교가 관계자는 “아세안 문화센터, 아세안 사이버보안센터 등 연초 약속했던 것들을 모두 추진했고, 인도를 제외한 15개국이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타결을 선언함으로써 내년 최종 타결을 위한 정치적 동력까지 확보해 차기 의장국에 넘겼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세안 의장국이라는 견장을 떼고 보면 태국의 존재감은 예전 같지 않다. 52년 전 아세안 창설을 주도했고, 2000년엔 북한을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 회원으로 끌어들여 세계적 이슈들을 만들었다. 또 2004년에는 ‘아예야와디-차오 쁘라야-메콩 경제협력전략’(ACMECS)을 출범, 메콩 5개국을 다시 한번 더 뭉치게 해 정치, 외교적 안정까지 이끌며 리더십을 발휘했지만 이후론 이렇다 할 ‘태국 작품’이 없는 상황이다. 아세안 역내 이슈 전문 낫타 꼬몬와딘 태국PBS 기자는 “태국이 남중국해 문제 등 역내 주요 이슈에 대해 전혀 목소리를 내지 못했고, 관련 의제를 거의 리드하지 못했다”며 “태국이 약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 6월 상반기 아세안 정상회의 당시 채택한 ‘인도 태평양에 대한 아세안의 시각(AOIP)’ 성명도 인도네시아가 주도해 만들었고, 태국은 로힝야 사태와 관련해서도 미얀마에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접국임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관심을 표시하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는다.
엄은희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여전히 정치적 불안이 있고 최근에는 환율방어도 실패해 물가도 오르는 등 여러 면에서 태국은 모범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며 “그 리더십에 관한 한 기대보다는 관망이 대세”라고 전했다.
◇솟아오르는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등과 함께 아세안 후발주자(CLMV)인 베트남은 일찌감치 이들과 다른 길을 걸으며 머지않아 태국의 자리를 넘볼 것이라는 전망이 주를 이룬다. 국내총생산(GDP) 2,450억달러로 태국(5,050억달러)의 절반에 그치지만 연간 7% 수준의 높은 성장률, 확고한 정치적 안정성, 그리고 경제규모를 넘어서는 과감한 외교력이 돋보인다.
특히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에 있어 필리핀, 브루나이, 말레이시아 등 해양 아세안 국가 대부분이 중국과 이해관계가 걸려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가운데, 베트남은 아세안에서 유일하게 중국과 각을 세우는 나라로 주목을 받는다. 사실상 베트남이 아세안을 대표해 중국과 상대하고 있는 모양새다. 카위 총키타완 방콕 출라롱꼰대 국제안보연구원(ISIS) 선임연구원은 “베트남이 아세안 의장국이 되는 내년은 베트남은 물론, 아세안에도 중요한 해가 될 것”이라며 베트남의 역할에 높은 기대를 표시했다. 베트남은 내년부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이사국도 맡아 국제무대에서 중국을 상대로 한 압박전을 펼칠 것으로 보인다.
방콕 외교가 관계자는 “TV나 신문을 봐도 베트남을 의식한 보도가 눈에 많이 띈다”며 “외교무대에서도 빠르게 치고 나오는 베트남에 대한 태국의 위기감, 경계심이 곳곳에 배어 있다”고 말했다.
의사봉을 넘겨 받은 푹 총리는 아세안 회원국들을 ‘파트너’가 아닌 ‘형제’ ‘자매’로 칭하며 “급변하는 세상에 대응, 지속성장하기 위해서는 하나로 뭉쳐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며 단결을 강조했다.
◇베트남 좇는 미얀마
베트남이 태국을 바짝 추격하면서 메콩 패권 지각변동이 예고된 가운데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미얀마는 베트남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동남아 최강국의 자리에 있었지만, 군사 쿠데타를 통한 이른바 ‘버마식 사회주의’로 불리는 군부독재 여파로 1인당 GDP 1,300달러 수준의 세계 최빈국이다.
미얀마 정부의 행정, 경제 분야 자문을 맡고 있는 양곤 아시아재단 관계자는 “풍부한 자원과 노동력을 바탕으로 베트남과 같은 성장을 목표로 전략을 꾀하고 있다”며 “큰 비중의 행정력이 외국인 투자 유치에 집중돼 있다”고 전했다. 이 같은 정책에 따라 산업공단 개발이 활발하다. 일본이 먼저 진출해 터를 닦았으며 한국의 경우 LH공사가 양곤 북쪽 40㎞ 지점 225㏊ 규모의 공단 착공식을 최근 가졌고, 베트남 등지서 공단개발 경험을 축적한 태광은 양곤에서 북동쪽으로 50㎞가량 떨어진 바고지역에 120㏊ 규모의 공단 분양을 앞두고 있다.
이희상 KOTRA 양곤 무역관장은 “미얀마는 오랜 독재와 외부 제재로 50년간 시간이 멈춘 나라나 다름 없었다”며 “하지만 새 정부 출범 후 규제 개선과 함께 다양한 분야 육성책을 내고 있는 만큼 메콩 지역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곳”이라고 말했다.
방콕(태국)ㆍ양곤(미얀마)=정민승 특파원 ms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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