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 불신국과 지소미아는 모순
미국, 일본에도 유연성 요구해야
미국의 불신 해소하는 외교 절실
“내가 이런 상황을 감수해야(deserve) 하느냐”
몇 달 전 데이비드 스틸웰 미국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방한해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을 만난 자리에서 한 얘기다. 자초지종은 이렇다. 청와대 별관이 아닌 외교부 청사에서 면담한 것도 어색했지만, 그 자리에서 김 차장이 이례적으로 실무자들을 물리고 둘만의 대화를 요구했다고 한다. 스틸웰이 사전 논의가 없었다는 이유로 거절하자, 김 차장은 들고 있는 파일을 거칠게 책상에 내려놓았다고 한다. 이에 스틸웰 차관보가 불쾌감을 표시한 것이다.
의견이 엇갈릴 때는 논쟁할 수도 있지만, 지엽적인 의전을 놓고 감정 다툼이 벌어진 것은 매우 소모적이고 불필요했다. 해프닝으로 넘어갔지만, 뭔가 불편한 한미 관계가 드러난 상징적 장면이었다. 지금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연장 여부를 놓고 벌어지는 갈등이 이런 식이다. 이견을 넘어 감정적 골마저 느껴진다.
논리적으로만 보면 우리가 옳다. 사단은 일본 정부가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문제 삼아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고 수출규제를 한 것이다. 일본이 한국을 ‘안보 불신국’으로 규정한 이상 군사 정보 교환은 성립될 수 없고, 지소미아 연장 중단은 당연했다.
문제는 미국이다. 세상 이치가 뭘 요구할 때 적정선이라는 게 있고, 상대가 납득할 수가 있어야 하는데, 미국의 지소미아 연장 압박은 막무가내 식이다. 한미가 동맹이라면, 일본에도 유연성을 보이라고 얘기해야 한다. 미 합참의장, 주한미군 사령관까지 나서서 압박하며 내세운 논리가 ‘지소미아 종료가 한미일 3각 안보 협력을 무너뜨려 북한, 중국에 이로움을 준다’는 것이다. 상당 부분 타당하다. 한미일 안보 협력이 흔들리면 북한, 중국이 회심의 미소를 지을 것이다. 실제 한일이 대립하고 한미가 불편해지자 중국 러시아 군용기가 동해를 넘나들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의문이 든다. 한미일 안보 협력을 위해 왜 우리만 희생해야 하느냐고. 트럼프 대통령은 그렇다 쳐도 전략가인 미 국무부, 국방부 전문가들에게 묻고 싶다. 만약 미국의 으름장 때문에 일본이 아무런 양보도 하지 않는데 우리가 “예, 알겠습니다”라며 지소미아 연장을 결정하면, 그게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겠냐고. 그 순간 우리 국내에서는 “이게 주권 국가냐”라는 분노가 퍼지고, 반미 감정이 극심해질 것이다. 북한 중국은 우리를 우습게 보고 다양한 도발을 할 것이다. 이런 상황이 되면 미국의 걱정대로 북한, 중국에만 유리한 구도가 되는 것이고, 미국이 그토록 바라는 한국의 인도ᆞ태평양 전략 동참은 애당초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알던 품격 있는 동맹으로 미국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만 있어야 하나. 그건 하책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사실 우리의 잘못도 크다. 옳고 그름에만 매달려 정무적 접근, 막후 외교에 너무 소홀했다. 미국이 문재인 정부가 북한, 중국에 경도돼 있다는 불신을 갖고 있다면, 그걸 해소하는 노력을 치열하게 해야 했다. 아울러 동맹, 우방국과의 관계가 악화할 수 있는 함정들은 미리 메꿨어야 했다. 사법부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이 나왔을 때 일본의 협상 요구에 응해서 정치적 해결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게 잘 안됐다면 일본의 수출규제에 대응하는 카드로 지소미아 종료를 택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것은 미국이 가장 중시하는 중국 견제 전략의 토대를 무너뜨리는 선택이었다. 이 역시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면, 지금부터라도 지소미아 연장과 일본의 원상회복을 맞바꾸는 데 외교적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아무리 해도 일본이 요지부동이고, 미국이 중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소미아 종료 이후 험한 상황이 조성되더라도 다시 협상을 해서 해법을 마련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막다른 골목에 몰리지 않도록 하는 게 정부의 실력이고 의무다. 서두의 사례처럼 불필요하게 미국을 자극하지 않고, 불신을 해소하는 지혜를 발휘했으면 좋겠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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