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대학 입시는 꼭 30년 전 학력고사였다. 그때는 지금처럼 사교육이 아주 극성스럽지는 않았으나, 금지됐던 과외가 조금씩 확산되던 시기라 학원 등을 이용하는 학생들도 제법 있었다. 당시 정부에서는 과외 과열을 막고 농어촌 지역 학생들에게도 도움을 준다는 취지로 이른바 ‘TV 과외(TV 고교가정학습)’ 방송을 시작했었다. ‘부산 촌놈’이던 나에게 TV 과외는 신세계였다.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쳤던 유명 학원 강사들을 TV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격적이었다. 그러나 감격은 곧 좌절감으로 바뀌었다. 서울의 잘사는 집 학생들은 원한다면 언제든 이런 입시맞춤형 강의를 들을 수 있지 않은가. 그때 난 처음으로 공정한 입시에 가려진 불공정한 현실을 느낄 수 있었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말에 대입해서 생각해 보자면, 출발선이 다른 사람들에게 평등한 기회는 과정이 공정하더라도 출발선과 똑같은 결승선을 의미할 뿐이다. 과연 이 결과를 정의롭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공정성이 시대의 화두가 된 지금 과연 공정함이란 무엇인지 사회적인 토론과 합의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공정하다’의 사전적인 의미는 ‘공평하고 올바르다’이고 ‘공평하다’의 사전적인 의미는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없이 바르다’이다. 이 정의에 충실하다면 평등하다, 또는 기계적으로 균등하다는 뜻에 가까운 말은 공평하다이다. 한편 공정하다에 포함된 올바르다는 정의로움을 내포하고 있다. 내가 이해하는 정의에는 각자의 몫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따라서 공정성이란 기계적 평등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위나 영향력에 따른 차등 대우도 포함하는 더 넓은 개념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편의상 공평성은 절대적 공정성, 공평하지 않은 공정성은 상대적 공정성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1인 1표제나 무상급식, 징병제 등은 공평성에 속한다. 전국적으로 똑같은 시험을 봐서 그 점수대로 평가하는 방식도 공평하다. 반면 최근 도입을 추진하고 있는 재산비례 벌금형은 공평성이 아니라 상대적 공정성에 속한다. 같은 죄를 지어도 돈 많은 사람이 더 많은 벌금을 내는 제도는 공평하진 않으나 공정한 속성이 있다. 사회적인 지위에 상응하는 책임과 의무를 뜻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상대적 공정성의 정의 자체에 가깝다. 이를 뒤집어보면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책들 또한 상대적으로 공정하다. 대학에서 기회균형전형 또는 지역균형전형으로 학생들을 뽑는 제도도 여기 속한다.
공정성의 절대적 또는 상대적 가치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는 사회적인 합의가 필요한 문제이다. 빈부에 상관없는 보편복지로서의 무상급식이 이제는 상식이 되었지만, 돈 많은 사람에게 세금을 더 많이 걷고 취약 계층에 대학 문호를 더 넓히는 정책이 불공정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공정성을 공평성만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에겐 예컨대 기회ㆍ지역균형 선발이 불공정하다고 여겨질 것이다. 극소수이겠지만 심한 경우에는 이렇게 선발된 학생들을 차별하고 멸시하는 ‘불공평한’ 언행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분들은 수시전형보다 수능시험이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정시전형이 더 공정하다고 말할 것이다. 빈부에 상관없이 누구라도 똑같은 전국단위 시험을 봐서 그 결과로 나온 점수만으로 평가하는 게 가장 공정하지 않으냐는 주장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학력고사 시절로 돌아가자는 복고주의와 만난다. 그러나 수험생이 시험을 치르기 위해 고사장에 앉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하면 시험의 공평성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상대적 공정성의 문제가 남는다. 나는 수시전형이 더 공정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출발선의 차이를 극복할 수 없는 공평한 시험은 오히려 계층들 사이의 차이마저 공평하게 유지시켜 계층 간 이동을 막고 기득권을 고착시킬 수도 있다.
사람들이 조국 전 장관에게 분노한 까닭은 위법 여부를 떠나 딸의 입시에 이른바 ‘아빠 찬스’를 활용하고 펀드로 돈을 굴린 것이 불공정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상대적 공정성이 힘을 발휘했다. 그러나 출발선이 다른 문제를 해결하는 공정성은 앞선 사람들 개개인이 고도의 도덕심을 발휘해 자신의 출발선을 뒤로 물리는 것보다 뒤처진 사람들의 출발선을 제도적으로 끌어올리는 방식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 굳이 자녀를 꼭 외고에 보냈어야 했냐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최근 정부의 자사고ㆍ국제고ㆍ외국어고의 일반고 전환 방침에 반발하는 모습은 이해하기 어렵다. 불공정이 재생산될 수 있는 구조를 용인한 채 “너는 안 돼” 하는 공정성은 이기적이고 선택적인 공정성이다.
따지고 보면 10대 말의 어린 나이에 이후 인생을 좌우할 너무나 많은 것들이 입시라는 한 번의 이벤트로 정해진다는 사실 자체가 불공정하다. 여기서 성공해 학벌주의의 가장 큰 혜택을 받는 학생들이 자기 지위와 관련된 공정성에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우리 사회가 이기적 공정성만 대물림하는 것은 아닌지, 이제는 공정성의 공정성도 살펴봐야 할 때다.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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