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내년 1월 시행이 예정된 중소기업(50~299인 사업장)의 주52시간 근로시간제(주52시간제) 적용을 사실상 유예하기로 한 가운데, 각종 유연근로제(노사가 근로시간을 자율적으로 조정하는 제도)를 확대하자는 정치권의 압박이 높아지고 있다. 정부의 노동시간 단축 의지가 후퇴하는 반면, 장시간 노동을 방지하기 위해 노사정이 약속한 ‘과로사방지법’ 제정 논의는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19일 노동계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대통령직속 사회적 대화 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산업안전보건위원회(이하 산안위)는 최근 과로사방지법 제정에 대한 노사정 논의 마무리 시한을 당초 다음 달 16일에서 잠정 연기했다. 논의 시한이 늦춰진 것은 지난달 국정감사에서 임이자 자유한국당 의원이 산안위 위원장이었던 박두용 산업안전보건공단 이사장의 사임을 요구, 박 이사장이 사의를 표명하면서 위원장이 공석이 됐기 때문이다. 임 의원은 고용노동부 산하기관장이 외부활동(경사노위)에 치중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며 박 이사장의 사퇴를 촉구했다.
지난해 7월 발족한 산안위는 △과로사방지 관련법 제ㆍ개정 △산업안전보건행정체계 개편 △중소기업 안전보건 강화 등을 논의해왔다. 특히 과로사방지법 제정은 경사노위가 지난 2월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기존 3개월에서 6개월)에 합의하면서 집중 논의해왔다. 현재 국회에는 노동자의 과로사를 막기 위한 정부의 대책 수립과 감독 책임을 강화하는 내용이 담긴 과로사방지법 제정안(신창현 민주당 의원)과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정미 정의당 의원)이 계류돼 있다. 산안위가 이와 관련해 노사정 합의안 또는 부분합의안을 도출하기로 한 상황이다. 산안법상 ‘과로’는 4주 연속 64시간, 12주 연속 60시간 근로를 기준으로 판단하는데, 탄력근로제 적용시 주당 최대 64시간 근무가 가능해 과로 위험이 가중된다는 데 경영계도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안위에서의 과로사방지법 제ㆍ개정 논의는 탄력근로제 확대 입법이 국회에서 표류하면서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다. 한국노총 관계자는 “경영계는 국회가 탄력근로제를 포함한 각종 유연근로제 입법 논의를 마친 후 과로사 대책을 논의를 할 수 있다는데 (노동계 입장에선) 받아들일 수 없는 사안이라 합의에 속도를 내기 쉽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산안위 관계자 A씨는 “과로사방지법 제ㆍ개정에 대한 합의문을 조율하는 과정이 남아 있었는데 회의를 열지 못하고 있다”며 “정부가 주52시간 시행을 유예하는 등 노동정책 기조가 흔들리는 상황이기 때문에 과로사 대책 논의도 후퇴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전했다.
노동자 건강권 보호를 위한 과로사 방지 대책 논의가 지지부진한 사이, 노동시간 단축을 무력화시키는 정부의 행보는 빨라지고 있다. 고용부가 18일 중소기업의 주 52시간제를 연기하는 대책을 내놓은데 이어, 이낙연 국무총리는 이날 국무회의에서 “정부가 주52시간제 보완책을 내놓았지만 (근본적 해결을 위해) 국회가 근로기준법 개정안(탄력근로제 확대)을 조속히 처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런 가운데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은 근로시간단축제도를 무력화시키는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추가 확대(1년으로 연장), 선택적 근로시간제 정산기간 확대, 재량근로제 확대 등의 입법도 함께 논의해야 한다며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노동계의 반발은 더욱 거세졌다. 우문숙 민주노총 정책국장은 “탄력근로제, 특별연장근로 인가 확대 등은 노사 합의를 전제하고 있지만, 노조가입률이 10% 수준에 불과한 현실에 비춰보면 협상력이 미미한 노동자들의 ‘근로시간 주권’은 훼손될 수밖에 없다”며 “중소기업 노동자는 현재도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데, 앞으로도 건강권 보장은커녕 장시간 노동을 반복해야 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유정엽 한국노총 정책실장은 “정부가 특별연장근로 인가 요건에 ‘경영상 사유’를 포함하면 과로를 방조하는 것으로 건강권 보호를 명시한 헌법(제10조)에 위배된다”며 “정부가 52시간제 훼손을 강행하면 헌법소원을 비롯한 행정소송을 추진하고, 경사노위 참여도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김지현 기자 hyun1620@hankookilbo.com
진달래 기자 az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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