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소미아ᆞ방위비 갈등, 한미 앞날 가시밭
“한미 동맹 관계 재정립 필요” 기류 형성
새 안보환경 헤쳐갈 정부 역량부터 점검을
미국이 지금 한국에 단단히 뿔이 나 있다. 국방장관과 합참의장, 국무부 한국 담당 4인방이 총출동해 노골적으로 지소미아 연장을 요구했지만 소득이 없었다. 방위비 분담금 증액 압박은 더 강했다. 외교적 예의나 체면은 집어던졌다. 오만무도하다는 비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협상 대표는 회의 시작 10분 만에 자리를 박차고 나갔고, 주한 미국대사는 국회 상임위원장들을 불러 ‘돈타령’만 했다. 그래도 정부 입장을 바꾸지 못했다. 피로 맺은 67년 동맹국 미국의 흔적은 찾기 힘들다.
미국의 태도는, 심하게 비유하면, 상인에게 보호비를 뜯는 조폭의 모습과 유사하다. 구원이 있는 옆 상점 주인의 영업방해 행위는 못 본 체하면서 되레 영업정보 공유가 상권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강변하고, 다른 조폭이 횡포를 부리지 않게 하려면 보호비를 더 내라고 협박하는 격이다. 이런 미국을 향해 정부는 “No”를 외쳤다. 일본에도 보복 철회 없인 지소미아도 없다고 “No”를 했다. 급기야 미국은 주한미군 축소라는, 건드려선 안 될 패까지 만지작거리고 있다.
이런 미국을 향해 여권에서는 “한미 동맹의 근본적 성격 변화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힘을 얻고 있다. 미국이 요구하면 무조건 따라야 하는 주종적 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국가 관계로의 전환이 필요하며, 그러려면 구한말처럼 열강들의 패권 각축이 치열한 지금이 우리 목소리를 내서 우리의 길을 갈 수 있는 적기라는 것이다. 신남방ᆞ신북방 정책이 미중 양쪽과 거리를 두면서 국익을 극대화하려는 선택인 점을 감안하면 이 같은 구상은 이미 시행에 들어간 셈이다.
명분과 원칙에 충실한, 당당한 외교는 국민들에게 통쾌함을 안겨준다. 하지만 일말의 불안감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의 국가적 현실이 미일을 극복하고 중국에 예속되지 않으면서 독자적인 길을 갈 만큼 탄탄한지에 대한 물음 때문이다. 이런 의문에 자주 외교, 자주 국방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그렇다”고 답하고, 반대 측은 “엄두도 못 낼 일”이라고 손사래를 친다. 하지만 양쪽 다 조건과 상황이 급변하는 현실을 온전히 반영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주장이다.
미국에 당당히 “No” 할 수 있는 대등한 동맹이 되려면 국가적 역량이 차올라 있어야 한다. 특히 정부가 능력과 안목을 갖춰야 한다. 조건과 상황도 맞아야 한다. 우리는 북한을 머리 위에 얹은 채 열강들이 변화무쌍하게 빚어내는 국제정세에 대응해야 하는 고된 처지다. 변수도 너무 많아서 보수 진보의 잣대로만 접근할 수 없는 고차 방정식과 늘 마주한다. 어떤 정권도 국가 발전과 존립을 위해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다. 외교 앞에서 너와 나가 아닌 ‘우리’만 있어야 하는 이유다.
그러면 문재인 정부의 역량은 어떤가. 역대 어느 정부보다 뛰어난가. 그 토대 위에서 한미 동맹의 성격과 관계를 재설정하려는 건가. 그런 전략적 목표가 세워졌다면 어떤 전술을 펴려 하는가. 외교 전략과 전술을 공유하며 국가적 역량을 한데 모아 대응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긍ᆞ부정이 교차하겠지만 결국 그에 대한 평가는 다음 정권에서 내려질 수밖에 없다. 정부의 대미ᆞ대일 정책이 부당하게 평가절하되는 일이 없도록 모든 진영과 소통ᆞ협력해야 하는 이유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ᆞ지소미아)이 23일 0시 종료된다. 극적 반전이 없는 한 지소미아의 생명력은 여기까지다. 미국이 지소미아를 중국 견제를 위한 인도ᆞ태평양 전략의 주된 축으로 인식해온 점에 비춰 이후 한미 관계는 불편해질 것이다. 정부 결정의 불가피성은 이해하지만 더 이상의 강조는 무의미하다. 이제 한미 동맹은 지금껏 가보지 않은 길을 가게 된다. 북중러의 밀착에 대응할 한미일 협력 체제에서 들리는 이상 신호가 어떤 위기를 잉태할지 예측하기 힘들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제부터 문재인 정부의 역량이 진정한 시험대에 오른다는 점이다. 일을 벌이는 것보다는 수습하고, 해결하고, 성과를 내는 것이 몇 배 더 어렵고 중요한 법이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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