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22일 “과거에는 자유진영에 있던 미국이 동맹을 관리ㆍ강화하기보다는 여러 압박을 통해 국제관계를 흩트리고 있다”며 미국우선주의에 우려를 표했다. 반 전 총장은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 간 ‘힘의 전쟁’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한국과 아세안(ASEANㆍ동남아시아국가연합)을 중심으로 다자주의를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자주의란 세계 수준의 협의체와 규범 등을 통해 여러 나라가 연루된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를 말한다.
반 전 총장은 이날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한국일보 주최 ‘2019 코라시아 포럼’에서 ‘스페셜 스피치’를 통해 “평화ㆍ인권ㆍ지속가능 개발이라는 3대 목표를 추구하는 유엔의 전직 사무총장으로서 다자주의에 대해서는 언제나 쌍수를 들어 환영한다”며 이렇게 밝혔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때 6,000만명 이상이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은 경험에 입각해 ‘다시는 이런 일을 만들지 말자’는 취지에서 창설된 게 유엔”이라며 “1990년대 초 공산주의가 몰락한 이후에는 자유진영을 통해 세계가 다자주의로 가는 과정에 있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반 전 총장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아메리카 퍼스트’(미국우선) 주의와 미국을 중심으로 한 무역전쟁이 다자주의를 쇠퇴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세계 최고의 국가, 제1의 국가가 되겠다는 강대국 간 경쟁관계 때문에 신냉전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며 “중국과 러시아가 미국이 하는 일에 대해 매사 반대하고 있고, 미국은 유네스코와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탈퇴한 데 이어 세계무역기구(WTO)와 파리기후협정에서도 탈퇴하겠다며 다자주의의 앞날에 먹구름을 드리우게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자주의는 한번 무너지면 다시 쌓기가 여러모로 힘들다. 제가 50년간 외교계에서 활동하면서 보니 (국가 간) 협상은 10년, 20년씩 걸리는 경우가 많더라”라고 경고했다. 회복이 어려운 만큼 악화를 막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얘기다.
반 전 총장은 미중 간의 패권전쟁을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빗댄 미국 정치학자 그레이엄 앨리슨의 분석을 언급하기도 했다. 앨리슨은 저서에서 기원전 5세기 당시 맹주였던 스파르타가 아테네의 급성장에 불안을 느끼면서 양국이 지중해의 주도권을 놓고 전쟁을 벌이게 됐던 것처럼, 미국과 중국이 전쟁으로 치달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다만 반 전 총장은 “미국과 중국은 자신들의 현재 위치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섣불리 전쟁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측하며 “3차 대전은 곧 인류의 멸망이기 때문에 반드시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한 해법이 다자주의에 있다는 게 반 전 총장의 주장이다. 그는 “유럽의 EU처럼, 다른 5대륙에는 전 나라를 총괄하는 기구가 있는 반면 아시아에만 없는데, 그런 아시아의 사실상 주축 역할을 아세안이 하고 있다”며 “세계 평화를 위해 아세안의 지속적인 성장과 한-아세안 관계의 심화를 간절히 기대한다”고 했다.
이서희 기자 shlee@hankookilbo.com
조소진 기자 sojin@hankookilbo.com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1970년 외무고시에 합격해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참여정부 때 제7대 외교통상부 장관을 역임했다. 2007년부터 2016년까지 한국 출신으로 최초, 아태지역 출신으로는 두 번째로 유엔 사무총장을 지냈다. IOC 윤리위원장과 국가기후환경회의 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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