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란 무엇인가] <4>정체성은 시간을 견디기 위한 ‘허구’다
※ ‘칼럼계의 아이돌’이라 불리는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한국의 정체성, 역사, 정치, 사상, 문화 등 한국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찾아 나섭니다. ‘한국일보’에 3주 간격으로 월요일에 글을 씁니다.
고대에서 시작된 역사가 중세를 거쳐 근대를 지나 현대로 흘러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리하여 고대나 중세는 먼 과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에 가보라. 그곳에는 여전히 “중세”를 마음에 담고서 현생(現生)과의 불화를 고요히 견디는 이들이 있다. 그처럼 오래도록 중세를 사는 사람들에게, 이 세속적인 현대 세계는 결코 보편적이고 영원한 가치가 실현되는 장소가 아니다. 그러한 가치는 사후의 천국에서나 온전히 실현될 것이기에, 그때가 올 때까지 그들은 이 현세(現世)에서 묵상에 임하고 전례를 행한다.
실로, 가톨릭 수도원 사람들은 매일 하느님께 성무일도(聖務日禱)라는 기도의 전례를 바친다. 성무일도의 기도는 보통 기도보다 훨씬 길기에, 신심이 깊지 않고 전례에 익숙하지 않은 범용한 사람들은 감히 시도하기 어려운 과업이다. 오래 전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에서 유숙(留宿)하던 차에, 나 역시 이 전례에 한 번 참여해 본 적이 있는데, 전례가 끝나자마자 지쳐 자빠져 잔 기억이 있다. 이 고된 성무일도는 특정한 시간에 맞춰서 하는 기도이기에 “시간경”이라고도 부른다. 수도원 사람들은 영원하고 보편적인 세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이 “시간”은 무상(無常)한 시간이 아니라, 전례에 리듬을 주는 이음매에 가깝다.
중세의 공동체에서 나와 세속의 도시로 돌아오면, 영원의 세계는 간 곳이 없고, 모든 것이 속절없이 바뀌는 현대의 시간이 흐른다. 무엇엔가 쫓기듯 일어나 출근하고, “투자에는 나중이 없습니다”라는 문자를 받고, 주식 시황을 살펴보고, 아파트 청약 상황을 점검하다가, 치주염을 다스리기 위해 치과에 다녀오다 보면,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진다. 그렇게 일용할 무의미와 고통을 모두 소진한 뒤에야 비로소 귀가하는 인간의 등 뒤로 덧없는 시간은 어김없이 흐른다. 입을 아무리 앙다물어도 이빨 사이로 속절없이 흐른다. 눈물과 위로 사이를 비집고 뱀처럼 흐른다. 때가 오면 삶은 간신히 맞춘 퍼즐 조각처럼 결국 무너질 것이다. 사후에 펼쳐질 천국에 대한 믿음 같은 것은 없다. 그러니 모든 현대적 가치는 이 덧없는 현세 속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그 어떤 것도 사후로 유예할 수 없으므로, 개별적 존재들이 우연 속에서 엉켜 몸부림치는 이 현세의 비빔밥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분투해야 한다. 이것이 중세가 아닌 현대를 사는 세속인에게 내려진 시간의 형벌이다.
자, 집을 사라. 당신이 실현할 가치가 무엇이든 일단 집을 사라, 그러지 않으면, 가치의 실현은커녕 너를 지탱하는 경제 기반은 비빔밥 속 밥알처럼 흩어지고 말 거야. 이렇게 한국 사회는 말한다. 당신의 부모가 특별히 부유하고 관대하다면 모를까, 이 과업은 불가능에 가깝다. 개울가에 떠도는 낙엽 같은 월급을 차곡차곡 모아서는 도저히 직장 근처에 집을 살 수 없다. 집값은 계속 오르기에, 무한정 기다릴 수도 없다. 집을 사기 위해 어서 돈을 은행에서 빌려야 한다. 돈 빌리러 왔는데요. 아, 그러세요. 그럼 고객님의 신용에 대해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신용(credit)이라니? 역사가 포콕(J.G.A. Pocock)에 따르면, 신용이란 것이 그 존재감을 확실히 한 것은, 17세기 후반 이래 각종 전쟁의 비용을 감당해야 했던 영국 자본주의 사회에서였다. 대출을 위한 신용이 날로 중요해지자, 토리당원이던 찰스 대버넌트(Charles Davenant)는 이렇게 우려한다. 신용이란 토지처럼 확실한 가치를 가진 자산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의견에 의존하는 가변적이고, 추상적인 형태의 자산에 불과하다고.
그도 그럴 것이, 토지와는 달리 신용은 손에 잡히는 대상이 아니다. 토지에 비해, 뭔가 “리얼”하지 않다. 신용이란 결국 타인들의 변화무쌍한, 변덕스러운, 불특정 견해에 의존하는 존재인 것이다. 지주들은 불안을 느낀다. 뭔가 엉터리 같은 허구(fiction)가 마치 토지처럼 자산 행세를 하고 있어! 그러나 신용이라는 것이 현실에서 작동하는 그 나름의 “실재”임에는 틀림없다. 신용에 기초해서 돈을 빌릴 수도 있고, 빌린 돈으로 밥을 먹을 수도 있고, 밥을 먹다가 연애를 할 수도 있고, 연인과 함께 집을 살 수도 있고, 그 집을 팔아 사업을 할 수도 있으며, 그 결과 파산을 할 수도 있다. 이처럼 신용은 실재한다.
토지 기반 사회와 양상이 다를 뿐, 신용에 기초한 자본주의 사회 역시 사람들이 실제로 살아가는 사회이다. 영문학자 산드라 셔먼(Sandra Sherman)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층 큰 역할을 하게 된 신용이라는 허구에 대해 사람들이 불안감만 느낀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허구를 즐기며, 나아가 그것을 삶의 동반자로 삼기조차 한다. 소설을 읽을 때 독자가 그 허구가 (잠정적) 실재라고 믿음을 통해서 이야기를 즐기게 되는 원리와도 같다. 이번 페이지의 사태를 일단 믿지 않고는 다음 페이지에서 전개될 사태를 즐길 방법이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용이라는 허구를 믿지 않고는, 경제인들은 미래의 자산을 끌어다 쓸 수 없다.
사실, 인생이란 한 치 앞을 모르는 게임이 아닌가. 그러나 이 신용이라는 허구로 말미암아 현대인은 우연으로 점철된, 불확실하고, 덧없는 시간을 견딜 수 있게 된다. 신용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누군가의 미래를 “대표”(represent)한다. 만약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가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라면, 신용이라는 것은 아예 존재할 수도 없을 것이다. 오늘 돈 빌리러 온 사람이 10년 뒤 돈을 갚을 사람과 별개라면, 대체 누굴 믿고 돈을 빌려주겠는가. 인간은 찰나를 사는 존재가 아니라 제법 긴 시간에 걸쳐 같은 정체성을 유지하는 존재이기에, 신용은 성립하고, 자금은 대출될 수 있다. 정체성이라는 허구를 통해 인간은 미래로 뻗어 있는 긴 시간을 견디는 존재가 될 수 있고, 신용이라는 허구를 통해 당장 돈이 없는 사람도 미래의 자산을 끌어다 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정체성과 신용을 가진 나는 빈털터리가 아니라, 미래에 이자까지 쳐서 빚을 갚을 자산가이다.
자산가 “나”는 이제 보무도 당당히 주택담보대출을 하러 은행에 간다. 그러나 “나”의 신용이라는 것이 내가 사려는 아파트 담벼락만큼 단단한 것은 아니다. 내 신용은 나에 대한 타인의 견해에 달려 있다. 특히 정부는 금리를 통해 내 신용과 주택담보대출 액수를 쥐락펴락할지 모른다. 그리하여 나는 끝내 직장 근처에 집을 구하는 데 실패하게 될지 모른다. 그러면, 한 시간이 넘는 긴 시간을 거리에 뿌려가며 출퇴근하게 될 것이다. 한동안은 버틸지 모르나, 결국 체력이 바닥나고 말 것이다. 체력이 고갈되면 성질도 더러워질 것이다. 성질이 더러워지면,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기 시작할 것이다. 외롭겠지. 외로움을 달래느라,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은들, 그 아이는 이 고된 삶의 환경을 대물림 할 가능성이 크다.
내세에 대한 믿음이 없기에, 많은 이들이 채 100년도 못 되는 인생의 외로움과 덧없음을 견딜 수 없다. 자신이 순간을 살다가는 불나방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참을 수 없기에, 자기 닮은 자식을 상상한다. 너는 내 자식이란다. 너와 나는 한배를 탔단다. 정체성을 공유한단다. 내가 너이고, 네가 나란다. 신용이라는 허구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미래로 확장했듯이, 미래의 자식을 상상하며 자신을 다음 세대로 연장한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자식을 상상하며, 오늘 하루도 힘을 내어 고된 삶을 견디어 나간다. 정기 예금을 알아보고, 주식시장을 점검하고, 주택담보대출 조건을 꼼꼼히 따져본다. 정체성이라는 허구가 없었더라면, 차마 감당하지 않았을 노고를 기꺼이 감당한다. 그로부터 생겨나는 의미에 힘입어 개별자의 숙명인 우연의 허망함을 견디어 나간다. 이것이 오늘도 산산이 흩어지는 시간의 입자를 견디는 어떤 현대의 방식이니, 메마른 현대인의 입술을 통해 고백하게 하라. 내 인생의 진정한 적은 시간이었다고.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