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 국민청원 “성범죄 조건 ‘비동의’ 아닌 폭행과 협박”
구하라 전 연인 몰카 협박 혐의 무죄도 재조명
“(서로) 호감이라서 감형, 폭행과 협박이 없어서 무죄, 피해자가 피해자답지 않아서 감형. 이 모든 가해자 중심적 성범죄 양형기준의 재정비를 바랍니다.”
게시 열흘 만인 25일 20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은 청와대 국민청원의 ‘가해자 중심적인 성범죄의 양형기준을 재정비 해주세요’라는 글이다. 양형기준이란 재판부가 법에 정해진 범위 내에서 형을 가중ㆍ감경할 때 참고하는 기준으로, 성범죄를 비롯한 살인, 뇌물, 절도 등 20개 주요 범죄에 양형기준이 도입돼 시행 중이다.
그렇다면 왜 20만명이 넘는 국민들은 성범죄의 양형기준을 재정비해달라고 나선 걸까. 청원인은 스스로를 과거 대학 선배에게 강간미수에 가까운 성추행을 당했고, 올해 초 이를 성폭력으로 고소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가해자는 자신의 죄를 인정했고, 어떠한 합의도 사과도 반성도 없었으나 결과는 (검찰의) 기소유예”라며 “순전히 가해자 중심적인 판결로 성범죄의 성립 조건이 비동의가 아닌 ‘항거 불능할 정도로 폭행과 협박’이고 이를 피해자가 직접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 재판 과정에서는 강간죄의 구성 요소인 폭행ㆍ협박을 좁게 해석하는 ‘최협의설’이 30년 이상 유지되고 있다. 대법원은 1992년 “폭행ㆍ협박이 피해자의 항거를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에까지 이른 것이라고 보기는 미흡하다”며 강간치상죄를 유죄로 판단한 원심을 깨고 서울고법에 돌려보낸 바 있다. 지난 6월에도 법원은 초등학생에게 술을 먹이고 성폭행한 30대 학원장을 “직접적인 폭행 또는 협박이 없었다”는 이유로 감형, 청와대 국민청원에 판사 파면 청원이 등장하는 등 거센 반발을 사기도 했다.
청원인은 “호감을 가진 사이니까, 뽀뽀했으니까 그 이상 싫다고 소리를 지르고 반항해도 정상참작”이라며 “이게 모두 여자의 NO를 NO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해자 중심적인 사고 방식”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가해자의 미래만을 걱정하고 가해자의 입장에 감정 이입했던 인식들이 바뀔 때가 됐다”고 주장했다. 여성단체에서도 역시 ‘폭행 또는 협박’을 강간죄 구성요건으로 하는 현행 형법 297조를 ‘동의’ 여부로 바꿔야 한다고 꾸준히 주장하고 있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도 지난해 ‘피해자의 자발적 동의’를 기준으로 강간죄를 정의하라고 한국에 권고했다.
해당 청원은 24일 전해진 가수 구하라씨의 비보를 계기로 재차 불붙고 있다. 구씨를 폭행하고 협박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전 연인 최모씨는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았다. 재판부는 다른 혐의들은 모두 유죄로 봤으나, 불법촬영 혐의에 대해선 무죄로 판단하면서 “피해자 또한 피의자의 사진을 촬영했던 당시 정황 등을 볼 때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찍은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이유를 든 바 있다.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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